항목 ID | GC0320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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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形遺産 |
영어의미역 |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연극·음악·무용·공예 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 중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문화재.
[개설]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는 김천시에서 일정한 형태가 없는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으로 가치가 큰 문화재를 일컫는다. 국가 무형문화재로는 금릉빗내농악이 2019년 9월 2일 국가 무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으며, 경상북도에서는 금릉빗내농악, 김천징장, 김천과하주 등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내용]
1. 금릉빗내농악
금릉빗내농악은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에서 삼한 시대 소국인 감문국의 나랏제사로부터 유래된 군사굿이 농악으로 발전한 전국 유일의 진굿이다. 1984년 12월 29일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기능 보유자는 손영만이다. 2019년 9월 2일에 국가 무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빗내농악이 유래된 빗내마을은 김천 시내에서 선산 방면으로 지방도를 따라 12㎞ 거리의 사달산(四達山)과 감천 사이의 개령평야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광천리(光川里)는 빗내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을 앞을 흐르는 감천이 마을 앞을 빗겨서 흐른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김녕 김씨와 진주 하씨 집성촌으로 예부터 개령평야를 중심으로 비옥한 평야지가 많아 부촌(富村)으로 일컬어졌다. 이 마을 인근의 동부리와 양천리가 감문국의 도읍이었던 관계로 감문국의 영역에 속했으며, 서기 231년 신라에 의해 감문국이 멸망된 후 상주목 관할의 개령현에 속했다. 지금도 옛 감문국의 궁궐터와 성터가 남아 있으며 마을 뒷산인 사달산에는 감문국 시대 장군인 원룡이 먹고 자랐다는 원룡장군샘과 군사를 동원할 때 피리를 불었다는 취적봉(吹笛峰), 북을 울렸다는 당고산(撞鼓山)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빗내마을은 개령평야를 기반으로 하여 고대부터 취락을 이루어 온 전형적인 농촌으로 여기서 생성된 빗내농악은 한국 농악이 대부분 농사굿인데 비하여 그 전개 형태가 전형적인 군사굿으로 전승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빗내마을에서는 감문국의 나라 제사와 풍년제가 동제 형태로 전승되어 왔는데 음력 1월 6일에 동제와 더불어 풍물놀이와 줄다리기 두 가지가 행해진다. 빗내농악은 이때에 행해지는 풍물놀이로 단순한 농사굿이 아니라 빗신과 감문국 시대 전쟁 과정에서 유래된 경상도 특유의 진(陣)굿으로 전승되어 온 농악이다.
빗내농악의 상쇠는 제1대 정재진, 제2대 이군선, 제3대 윤상만, 제4대 우윤조, 제5대 이남훈, 제6대 김홍업, 제7대 한기식, 제8대 손영만 등으로 뚜렷한 계보가 이어져 내려온다. 빗내농악 편성은 인원의 제한이 없으며 노소를 불문하고 놀이에 가담하나 보통 한 가구당 1명씩 동원되어 놀이패가 구성된다. 복색은 흰 저고리와 흰 바지에 행건을 하고 쾌자[조끼]를 입으며 홍, 황, 녹 3색의 복색과 머리에는 전립과 흰 꽃으로 장식된 고깔을 쓴다. 상쇠는 등판에 금빛 장신구가 달린 특이한 복색을 하고 앞이마에 꽃을 달며 쇠채에 5색 천을 달아 총지휘자임을 알린다.
놀이 내용은 12가락, 119마치인 질굿, 문굿, 마당굿, 반죽굿, 도드레기, 영풍굿, 허허굿, 기러기굿, 판굿, 채굿, 진굿, 지신굿으로 구성된다. 빗내농악은 경상도 내륙 농촌에서 전승된 풍물로 농사굿이 아닌 진굿 또는 진풀이로 12가락의 굿판이 명확한 구분을 가지면서 마치, 즉 잔가락의 종류도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농악기의 종류와 구성 인원은 쇠 4, 징 4, 북 8, 장구 8, 소고 6, 농기 3, 영기 2, 잡색 등이다. 12가락 119마치로 구성되는 가락별 내용을 살펴보자.
1) 질굿: 행진하는 가락으로 쇠에 맞추어 모든 풍물꾼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진한다. 문굿은 3마치로 풍물꾼이 내방을 알리는 신호격으로 상쇠가 입장할 때 또는 대문 앞에서 “주인! 나그네 들어가요.”하면서 알린다.
2) 마당굿: 4마치로 마당에 들어서서 놀이 과정, 즉 훈련 준비로서 원형을 그리며 정열하여 쇠에 따라 전 풍물꾼이 관중에게 인사를 한다.
3) 반죽굿: 6마치로 상쇠와 종쇠의 가락에 따라 전 풍물꾼이 놀이 훈련에 들어가는 가락인데 상쇠와 종쇠가 서로 이동하면서 전 대원을 훈련시킨다.
4) 도드레기: 12마치로 상쇠와 종쇠가 노래에 맞추어 쇠를 치면 전 풍물꾼은 쇠가락에 맞추어 노는 가락으로 각 배역마다 점검을 하는 격으로 모든 풍물꾼이 신명나게 뛰어 논다.
5) 영풍굿: 28마치로 상쇠와 종쇠가 영풍대를 치면 소고는 가락에 따라 여러 번 엎드려 자기의 장비가 이상이 없음을 자랑하고 이때 쇠를 그치면 북과 장구만 신명나게 치며 자기의 장비가 이상이 없음을 과시한다.
6) 허허굿: 12마치로 상쇠가 가락을 치다가 ‘허허’하며 소리를 지르면 전 풍물꾼이 이상 없음을 답하면서 논다.
7) 기러기굿: 18마치로 각 구성원 장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한 상쇠는 흥이 나서 기러기 가락을 치면 전 풍물꾼은 옆으로 뛰고 장구, 소고는 채북을 잡고 기러기 모양으로 덩실덩실 춤을 춘다.
8) 판굿: 18마치로 상쇠의 지휘에 따라 원진을 풀면서 쇠와 징, 북, 장구, 소고가 각기 작은 원진을 그리면서 5방진을 친다. 이어서 전 풍물꾼이 양쪽으로 갈라 선 굿판 가운데서 북놀이, 장구놀이, 소고놀이 순으로 판굿을 논다.
9) 체굿: 12마치로 상쇠와 종쇠의 젯북가락에 맞추어 소고 두 사람이 나와 수박(手拍)치기를 하는데 이는 맹렬한 싸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10) 진굿: 6마치로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놀이로서 상쇠와 종쇠가 각각 대장이 되어 두 편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격전을 벌인 후 상쇠가 징을 풀면 모든 풍물꾼은 한데 어우러져 덧배기 가락의 춤굿으로 흥청거리며 흥을 돋운다.
11) 지신굿: 상쇠의 인도에 따라 모든 풍물패가 한판 흐드러지게 노는 마당판을 의미하며, 이 굿이 끝나면 놀이[전쟁]가 끝났으므로 각기 헤어져 돌아간다. 전 풍물꾼이 흥겨운 마음으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 가락을 치면서 상쇠가 선창하면 전 풍물꾼은 “얼얼루 상사디야”라 부르며 헤어져 돌아간다.
2. 김천정(金泉鉦)
김천징은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133-3번지 김일웅을 보유자로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방짜유기로 통칭되는 김천의 유기(鍮器)는 약물내기[藥水洞: 현 양금동] 일대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말까지 전국적인 산지로 명성을 얻었다. 주요 제조 품목은 놋쇠 그릇을 비롯한 세수 대야, 양푼, 요강, 징, 꽹과리, 수저 등에 이르기까지 놋쇠 기구 일체를 이곳에서 생산했으나 1950년대 이후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나 김천의 유기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지금은 김일웅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천징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김일웅은 함양에서 4대째 징을 만들던 외조부에게서 6년 간 그 기술을 익혔다. 김천에서 자리를 잡고 외삼촌과 함께 농악기 공장을 차려 지금까지 40여 년 간 가내 공업으로 징을 비롯한 유기 제품을 만들어오고 있다. 징은 만든 장인의 솜씨에 따라 왕왕거리는 소리, 굽이치는 소리, 길게 울리는 소리, 끝이 올라가는 소리 등 다양한데 제대로 된 징의 소리는 깊고 긴 여운이 있고 가슴 깊이 파고드는 호소력이 있다고 한다.
징을 만드는 순서는 먼저 구리 160, 납 43의 무게 비율로 녹인다. 녹인 쇳물로 손바닥 크기로 만든 ‘바다기’를 쇠판에 올려놓고 ‘앞매꾼’, ‘전매꾼’, ‘센매꾼’ 등이 번갈아 메로 두드려 도둠질을 하여 지름 30㎝ 정도 되는 넙적한 ‘초바다기’를 만든다[현재 이 과정은 매꾼 대신에 기계를 이용하여 두드림]. 바다기 3장을 포개어 잡고 불에 달군 다음 가장자리를 두들겨 가며 오그려서 징의 형태인 ‘이가리’를 만든다. 이가리를 불에 달군 다음 집게로 잡아 돌리면서 망치로 두드려 바닥을 얇고 편편하게 고르는 ‘싸개질’을 한다. 바닥은 가운데에서부터 두께를 점점 얇게 골라 나간다. 그 후 불에 달구었다가 물에 담가서 강도를 조절하는 ‘담금질’을 반복하는데, 이 과정은 어두운 밤이라야 그 정도를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기본 형태가 끝나면 망치로 두드려 ‘울음잡기’를 한다. 첫 시험인 ‘풋울음’이 끝나면 태문양을 돌려가며 새기고, 구멍을 뚫어 손잡이 끈을 맨다. 끈을 매고 나면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다시 두드려 ‘재울음’을 잡는다. 재울음은 망치질 한 번만으로도 전혀 다른 소리가 나는 예민한 작업이다. 김천징은 황소울음과 같이 끝을 길게 끌다가 끝이 올라가는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3. 김천과하주(金泉過夏酒)
김천과하주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 791-1번지에서 1987년 5월 13일 송재성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받았고 현재는 송강호가 전승하고 있다.
과하주는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3대 명주의 하나로 1718년 간행된 향지 『금릉승람(金陵勝覽)』에 김천과하주는 익산(益山)의 여산주(礖山酒)와 문경의 호산춘(湖山春)과 더불어 전국에서 이름난 술이라 했다. 원래 김천시 남산동 고성산 아래에 있는 과하천(過夏泉)의 샘물로 술을 빚었는데 타지방 사람들이 과하주 빚는 방법을 배워 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술을 빚어도 과하주의 맛과 향이 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물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적고 있다.
과하주는 일제 강점기까지 큰 도가로 불린 김천주조회사에서 빚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에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재개되고, 다시 6·25전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4년 제2대 김천문화원 원장을 역임한 고(故) 송재성이 과하주 재현에 성공하고 본격적으로 생산에 착수하여 김천 명주의 맥을 이었다. 과하주의 재래 양조법은 찹쌀과 누룩가루를 같은 양으로 섞어 떡을 만들고 물을 넣지 않고 독에 밀봉하여 저온으로 1~3개월 발효시켜서 만드는데 알코올 14도 정도로 독특한 향기가 있고 맛이 좋다.
제조 시기는 정월 15일부터 우수 경첩 사이가 적기로 찹쌀 두 말을 과하주 샘물에 24시간 담갔다가 고두밥을 찐 다음 국화, 쑥을 밑에 깔고 짚을 편 위에 널어서 식힌다. 별도로 누룩가루 2말을 과하주 샘물 1말에 담갔다가 우려낸 물만을 사용하여 고두밥을 떡으로 만든다. 이렇게 반죽한 떡을 냉각하여 독에 넣고 한지로 밀봉하여 실내 온도 15~18도 되는 양조실에서 45일 이상 발효시키면 25도 정도의 정주 1말반 정도를 얻을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김천의 무형문화재인 빗내농악, 김천징, 과하주는 김천을 대표하는 특산물로서 김천인의 뛰어난 예술적·미적 감각을 상징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빗내농악은 현대적 시설의 전수관이 건립되어 빗내농악의 전승과 보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앞으로 징을 포함한 김천 방짜유기의 전수관과 과하주를 종합 홍보하는 공간이 건립되어 김천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는 무형문화재를 널리 알려서 관광 자원으로도 활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