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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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35년간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시기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역사.
[개설]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강점기는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와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로 불리는 민족분열통치기, 그리고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의 파쇼통치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식민통치 정책의 시기적 변화에 따라 이에 대응하는 전체 민족해방 운동의 추진 방법도 달라져갔다.
무단통치기의 민족해방 운동 전선은 전국토가 완전 식민지로 된 상태에서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민족해방 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전 민족적 저항 운동인 3·1운동을 준비했다. 민족분열통치기의 민족해방 운동 전선은 일제의 민족 분열 통치에 대응하기 위해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을 전개하였다.
파쇼통치기의 민족해방 운동전선은 당시 세계 전역에 등장한 파쇼 체제에 대항하고자 형성된 인민전선에 영향을 받아 민족 통일 전선의 구축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강점기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역사도 민족사의 고난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정치와 행정]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이후 총독부 체제로 개편하면서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체제를 구축하였다. 공주는 충청도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할되었던 1896년 8월부터 대전으로 충청남도 도청이 이전되었던 1932년 10월까지 충청남도의 도청 소재지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공주는 도청, 지방법원, 등기소, 경찰서, 세무서, 형무소, 우체국, 초등학교, 중학교 등 충청남도의 각종 관청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9월 칙령 제357호 지방관제에 따라 군수(칙임관), 군서기 및 기수(판임관)가 군 행정을 담당하였다.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공주군의 동쪽 79개 동리는 연기군에, 남동쪽 86개 동리는 대전군에, 남쪽 2개리는 부여군에 각각 편입되었으며, 남서부의 연기군·노성군·부여군·정산군의 9개 동리를 편입하여 13개면·6개 정·207개 리의 공주군으로 축소되었다.
1917년 6월 총독부 제령(제1호)로 조선의 면제가 실시되어 공주면은 지정면이 되었으며 지정면은 부분적으로 자치권이 부여되는 등 조선총독부로부터 특별한 취급을 받는 특수 행정 지역이었다. 지정면인 공주면의 면장은 일본인이 맡았으며 면협의원도 70-80%가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면협의회는 1920년 총독부 제령13호에 의거 설립되어 면장의 자문과 면세입출예산, 법령이 정한 것 이외의 수수료·사용료 부과금, 부역 및 현품부과징수, 차입금, 예산외 의무 부담 권리 폐기, 면유 재산 처분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정면의 면협의원은 면부과금을 5원 이상 납부한 특정 유권자의 비밀 보통 선거로 선출하였으나 대다수 일반 면의 면협의원은 주민들이 추천하면 군수가 임명하였다.
1920년대(1923·1926·1929) 공주의 면협의원은 김갑순, 서범순, 오경달, 이범규, 권익채 등이 역임하였다. 1930년대(1931·1935·1939)는 김갑순, 오경달, 권익채, 홍원표, 홍긍식, 이정구, 윤용섭, 박치련, 지헌정, 정한명, 양천손, 이강일, 이복문 등이었다. 이들은 대지주이거나 관직 및 공직에 있었거나 아니면 상업 활동에 종사한 사람으로 대부분 상당한 자산가들이었다.
이에 비해 군수의 지명으로 임명된 대다수 일반 면의 면협의원은 주로 면내 유력 동족마을(성씨) 대표자, 토지 재산과 사회 활동 능력을 갖춘자, 당국의 신뢰를 받거나 사회적 인망이 있는 면내 유지 급들이었다. 특히 면장의 경우 면내 특정 동족마을의 유지들이 각 면의 실세로서 해방 이후 시기까지 면장직을 독점하였다.
[경제산업]
1930년 일제의 국세 조사에 의하면 당시 공주군 내에는 정미제분소 8곳, 양조장 17곳, 과자점 6곳, 푸줏간 39곳, 쌀가게 65곳, 전당포 4곳, 여관 및 하숙집 63곳, 요리점 및 찻집 224곳, 이발소 43곳, 양복점 8곳, 표구사 17곳이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31년 말 공주군의 전체 농가는 15,977호였으며 이중 순지주 73호, 지주 겸 자작농 499호, 자작농 1,165호, 자작 겸 소작농 3,963호, 소작농 10,277호, 소작 겸 화전민 51호로 전체 농가에서 소작농이 64%를 차지하였다.
당시 공주 지역의 대표적인 지주로는 김갑순, 김윤환, 서범순, 홍원표, 정한명, 서덕순, 박준식, 오지영, 윤태보 등이 있었으며, 부재지주로서 경성의 김교준 등도 이 지역의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상업 분야는 1926년 말에 이르기까지 공주읍·광정·호계·경천·유구·대교·산정·이인 등지에서 정기시장이 형성되어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철도와 도로 교통을 통한 상권의 변화로 공주 지역은 점차 대전, 조지원, 논산, 강경 등으로 상권이 흡수되어 갔다. 특히 1931년 8월 천안과 장항 사이에 철도가 완성되면서 이전의 농산물 집하지로서 공주는 그 기능을 상실하였고 인근 지역에서 수송되는 물품의 소비 시장으로 변모하였다.
그 외 공주 지역에는 사법 기관인 공주지방법원이 있어 전문직 개업 변호사로 유정현, 권병훈, 유갑수, 박춘서, 임창수, 김종진, 윤용섭, 홍긍식 등이 활동하였다. 또한 방은두, 이규찬, 민용수, 임진웅 등의 전문직 의사들이 의생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38년도에는 양재순이 공제의원을, 김진규가 회생의원을, 이수창이 태창의원을 각각 경영하였다. 한편 한의 김낙현은 광창당을 기반으로 건재국과 광창약업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지역 단체]
일제는 각종 협의 조직 단체와 조합을 통해서도 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농업과 관련하여 공주에는 1920년대 초에 지주들의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1924년 10월에는 군내 7정보 이상의 지주들로 구성된 지주회가 개최되어 한해 피해에 따른 소작료 감면, 종자 공급의 알선, 개량 볍씨의 장려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16년 이후로 충청남도 내에 마을 단위로 많은 진흥회가 조직되어 풍기 개선, 산업 개선, 부업 장려, 저축 장려, 납세 장려, 교육 보급, 부인회 조직, 위선 개선, 도로 개수 등과 관련되는 활동을 담당하였다. 공주 지역에서도 1930년대의 경우 약 170개의 진흥회(회원 13,280명)가 조직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주 지역의 대표적인 진흥회는 탄천면의 삼각리 진흥회였다. 1920년 12월 이승태가 조직하였으며 1928년부터 조병호가 회장이 되면서 향약정신 실행, 산업 및 부업 장려, 생활 개선 및 교육 등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30년에는 모범진흥회로 선정되어 총독부로부터 250원의 조성금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1930년대부터 조선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진흥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1920년대부터 관료-유지 지배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군수와 친일적인 지방 유지들의 주도로 관민 또는 조일인(朝日人) 합동의 각종 유지 단체를 조직하였다. 공주번영회, 공주관민융화회, 공주유지회 등이 그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공주관민융화회는 1922년 공주면사무소 신축 낙성식 때에 당시 공주 지역 기관장과 한국인 및 일본인 유지들이 참여하여 처음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공주유지회는 1925년 3월 공주영명학교의 발전을 위한 토의를 위해 처음 소집되었다.
공주번영회는 한국인과 일본인 유지들로 구성된 상설 단체로 1922년 7월 공주 지역의 도시계획에 관한 협의와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충청남도 도청이전 반대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에는 1921년 4월 회원의 교양과 친목을 목적으로 조직된 공주친목회, 1936년 7월 공주 유지들의 상호 친목과 건강 증진을 위해 조직된 관풍정 활터모임, 공주상우회, 공주체육협회, 공주다화회, 공주공광단 등의 단체도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