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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교사건(1927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99
한자 公州高等普通學校同盟休校事件-年-
영어의미역 Gongju High School Strike in 1927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중학동 137지도보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생운동|항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27년 7월 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27년 7월 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공주고등보통학교
관련인물/단체 이철하(李哲夏)|공주고등보통학교|공주청년회

[정의]

1927년 7월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공주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일으킨 동맹 휴교 사건.

[역사적 배경]

1922년 5월에 개교한 공주고등보통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이 함께 다닌 학교였다. 교장을 비롯한 대다수의 교사가 일본인으로 조선을 무시하고 조선인을 폄하하는 말과 행동이 잦았다. 조선인 학생들은 이러한 민족 차별의 식민지 현실 속에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일본인 상점의 상품 불매 운동, 조선인 학생을 차별한 일본 경찰과의 충돌, 남선전기주식회사의 일본인 직원과의 충돌 등으로 나타났으며, 나아가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교장을 비롯한 일본인 교사들의 민족 차별은 더욱 심해졌으며, 조선인 학생의 이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1927년 6월 26일 공주고등보통학교 4학년인 이철하(李哲夏)가 그동안 조선을 멸시하고 조선인을 무시하는 등의 민족 차별을 일삼은 일본인 교장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공개 서신을 제출하였다. 일본인 교장은 이철하가 제출한 공개 서신을 보고 분개하여 그의 아버지를 호출하였다. 일본인 교장은 이철하의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이철하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퇴학을 시켰다. 공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철하가 부당하게 퇴학당한 사실을 알고서는 분개하여 동맹 휴학을 단행하기로 계획하였다.

[경과]

1927년 7월 2일 공주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 50여 명은 연명으로 날인한 진정서를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동맹 휴교를 단행하였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6가지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요구 조건은 첫째, 학생을 퇴학시킬 때 학교 측이 너무 경솔하게 하지 말 것, 둘째, 일본인 교장은 반성할 것, 셋째, 일본인 교사 마쓰이[松井]를 사직시킬 것, 넷째, 일본인 교사 이오카[飯岡]는 태도를 고칠 것, 다섯째, 일본인 교사 야쓰다[指田]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적 행동을 고칠 것, 여섯째, 교사(校舍) 및 이화학실(理化學室)의 건축을 조속히 실행할 것 등이었다.

학생들의 요구 사항은 조선인 학생에 대한 민족 차별을 중단하고, 그동안 민족 차별을 한 일본인 교장과 교사의 반성과 처벌을 담고 있었다. 아울러 열악한 교육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7월 13일까지 학교 당국이 요구 조건을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동맹 휴교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학생이 있더라도 일본인 교장의 사직을 요구하면서 끝까지 동맹 휴교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4학년에 이어 3학년 재학생 80여 명도 같은 날인 7월 2일 동맹 휴교를 결의했다.

7월 3일에는 2학년 재학생 90여 명이 회합을 가지고 4학년 학생의 요구 사항을 지지하며 동맹 휴교를 단행하였다.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단행하자, 학교 당국은 교내 기숙사에 있는 10여 명의 학생을 강제로 등교시키고 학부모를 회유하여 동맹 휴교를 무산시키고자 했다.

7월 3일, 학부형들이 동맹 휴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부형회(學父兄會)를 구성하고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는 학생 대표들도 참석하여 동맹 휴교를 단행한 이유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설명하였다. 학부형회는 책임을 지고 진상을 파악하여 원만하게 해결하겠다고 밝히면서 학생들에게 동맹 휴교를 중단하고 등교하기를 촉구하였다.

7월 5일, 학생과 학부형회 대표들이 다시 모임을 가졌다. 학부형회는 학생들의 요구를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면서 학생들의 등교를 재차 촉구하였다. 학생들은 이 날 오후부터 동맹 휴교를 풀고 등교하였다. 학부형회는 학교 당국과 교섭을 벌이기 위해 공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변호사 임창수(林昌洙)를 포함한 3명을 교섭위원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7월 17일에는 각 지에 있는 학부형을 소집하여 동맹 휴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부형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7월 6일, 학교 당국은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중단하고 등교하자, 동맹 휴교를 주도한 4학년 학생 2명을 퇴학시켰다. 학생들은 학부형회를 방문하여 항의하고,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였다. 학부형회는 학교 당국과 교섭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학교 당국의 강경한 조처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그러는 동안 동맹 휴교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계속해서 퇴학을 당하였다.

7월 20일, 공주청년회는 동맹 휴교로 학생들이 계속 퇴학당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긴급위원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였다. 공주청년회는 학부형회의 무능과 학생에 대한 고압적인 자세를 비판하는 경고문을 학부형회에 발송하였다. 아울러 학부형회가 학교 당국과 유착되어 있다며 이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단호하게 대응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이 학생들의 동맹 휴교 문제에 공주청년회가 개입할 경우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집회도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공주청년회는 더 이상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학부형회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동맹 휴교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결과]

동맹 휴교를 주도했던 학생 14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요구 조건도 관철되지 않았다. 학부형회는 학교 당국과 유착되어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이후에도 활동이 지지부진했으며 결국 1929년에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공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교사건은 학부형회의 기만적인 자세와 학교 당국의 강경한 자세로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지 못하고, 오히려 학생들이 퇴학당하는 등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공주고등보통학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 휴교였고,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켰으며, 1929년에 발생하게 될 동맹 휴교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주의 사회 운동 단체가 참여하는 등 공주 지역민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일제 교육 정책을 비롯한 식민지 지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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