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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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州灘川長丞祭 |
영어의미역 | Gongju Tacheon Guardian Post Religious Service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 |
집필자 | 구중회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9년 12월 29일 - 공주탄천장승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8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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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공주탄천장승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재지정 |
성격 | 장승제 |
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15일 |
의례장소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 |
신당/신체 | 장승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에서 정월 대보름날 남·여 장승을 합궁시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공주탄천장승제는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공주탄천장승제는 송학리의 소라실에서 마을의 안녕과 길일을 축원하는 마을 축제이다. 특히 축원에 의하면 칠성(七姓) 즉 공주의 토성(土姓)이 그 대상인 것으로 보아 단순히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 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주 지역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1923년 간행된『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송학리는 반탄면(半灘面) 학동(鶴洞), 선덕동(宣德洞), 학림동(鶴林洞), 송곡리(松谷里), 송서리(松西里), 토옥동(土沃洞) 등의 각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지역이다.
[연원 및 변천]
공주탄천장승제가 언제부터 열렸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마을이 생기면서부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축문에 ‘환송곡이존거혜 공칠성이영창(環松谷而尊居兮 共七姓而永昌)’이란 구절이 있어서 실마리가 될 듯하다. 송곡(松谷)이란 지명과 칠성(七姓)이 그것이다.
현재의 송학(松鶴)이란 행정 지명은 1914년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송곡(松谷)은 그 이전의 지명이다. 송곡이란 지명의 문헌상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1759)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1776~1800), 『공산지(公山誌)』(1861)로 내려오면서 반탄면(半灘面)에 속한 지역으로 나온다. 그런데『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동부면(東部面)에 포함된 지역으로 되어 있다.
칠성(七姓)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에 토성(土姓)으로 이(李)·정(鄭)·송(宋)·박(朴)·황(黃)·고(高)·임(任) 등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공산지(公山誌)』 등에서 칠성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들 송곡 지명과 칠성의 기록을 종합하면 늦어도 조선 전기 세종대 이후까지는 소급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공주 탄천 장승제는 조선 전기부터 시행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매봉산 기슭의 소라실의 동편 마을에 사모를 쓴 신랑 장승으로 동방천원축귀대장군(東方天元逐鬼大將軍)과 삼태봉 밑에 자리한 서편 마을에 비녀를 꽂은 신부 장승으로 서방지하축귀여장군(西方地下逐鬼女將軍)을 만들어 모신다.
최근에는 삼태봉 아래 삼거리에 목제로 세 짝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일종의 예술적 솜씨를 보이는 것으로 첫째 짝은 명문으로 ‘조상대대 물려받은 우리장승 전통장승 대대손손 수호지신 우리민족 빛난 문화 갈고 닦고 보존하여 후손 만대 물려 주자 민속문화 장승문화 세계만방 자랑하세.’라고 쓰인 재앙축귀대장군(災殃逐鬼大將軍)과 ‘동네 입구 홀로 서서 동네 안녕 하게 하며 행인 차량 무사하게 통행하고 삼재팔난 액운질병 속거철리 행하며 국태민안 시화년풍 소원성취 만복일세.’라고 쓰인 질병축귀여장군(疾病逐鬼女將軍)이 있다.
둘째 짝은 동방축귀대장군(東方逐鬼大將軍)과 서방지하축귀여장군(西方地下逐鬼女將軍)이며, 셋째 짝은 천하축귀대장군(天下逐鬼大將軍)과 지하축귀여장군(地下逐鬼女將軍)이다.
[절차]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편 매봉산 기슭의 신랑 마을과 서편 삼태봉 밑에 자리한 신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음력 정월 초육일부터 그 의례가 시작된다. 동·서편에는 각각 신농유업(神農遺業)의 농기를 들고 풍물을 치며 건립한 다음,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서 제관·축관·유사 등을 정한다. 의례에 쓰일 술을 빚으며, 정월 대보름까지 살상 따위와 같은 부정을 금하고 외부인과 상주(喪主)의 출입을 금지한다.
공주탄천장승제 의례는 정월 열 나흗날에 진행된다. 장승제 때 사용할 모닥불과 개인 취사용 화목(火木) 9짐을 마련해 놓은 후 잡곡밥 9사발을 먹는다. 공동 농기구인 가래줄·쟁기·써래줄·풍구 등을 수리하여 준비하고, 모깃불을 놓으며 집 주위를 청소하고 쓰레기를 태운다.
의례의 시작은 샘굿부터이다. 우물 청소를 하고 밤에는 풍물을 치며 고사를 지낸다. 본 의례는 정월 대보름날 아침 동·서 양편 마을에서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삼살(三煞)과 대장군(大將軍) 방위를 피하여 길방(吉方)의 산에서 장승 목과 오릿대 따위에 쓰일 소나무를 벤다. 동편 마을은 사모를 쓴 신랑 장승 동방천원축귀대장군(東方天元逐鬼大將軍)과 서편 마을은 비녀를 꽂은 서방지하축귀여장군(西方地下逐鬼女將軍)을 각각 만들고 장수 횃불을 위시한 군졸 횃불과 오릿대 등을 만든다.
그리고 서편 신부 마을에서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동편의 신랑 마을 기에게 세배하러 가면, 동편 마을 기가 마중을 나가 신부 마을 기를 세배 장소로 인도한다.
양 편은 각각 자기 농기를 에워싸고 흥겹게 논다. 술상을 차려 놓고 신부기가 네 번 절을 하면 신랑기는 답례로 두 번 절을 하고 신부기에 채단을 묶어준다. 기세배가 끝나면 양편 기를 포옹시키려고 상대방 기를 서로 오라고 옥신각신하면서 상대방 농기를 자기편으로 밀고 당기게 된다. 이때 많이 끌려간 편이 지는 것이고, 진편은 술과 안주를 대접하게 된다. 이때에 윷놀이와 널뛰기 등의 놀이가 벌어지다가 각각 자기 마을로 돌아간다.
날이 어두워지면 청사초롱에 불을 밝히고 농기·오릿대·장승을 앞세워 풍물을 치고 동구의 다리로 가서 화촉을 높이 밝힌 아래 청실홍실을 걸어놓고 혼례식을 거행한다.
표주박에 술을 따라놓고 신부 장승이 네 번 절을 하면, 신랑 장승은 두 번 절을 한다. 혼례식이 끝나면 아쉬워 끌어안고 신랑과 신부 장승을 베짜치로 서로 묶어 놓은 후 주민들은 춤을 추며 논다. 과거에는 밤이 깊으면 장승은 각기 자기 마을 어귀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한 곳에 모셔진다.
동편 마을과 서편 마을 주민들은 장승과 오릿대를 마을 입구에 서로 마주 보도록 세우고, 그 앞에 제물을 차려 놓은 다음 재앙과 질병을 쫓고 시화연풍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소지(燒紙)를 올리며, 장수 횃불을 선두로 남녀노소가 줄을 서서 각자 마을로 돌아간다. 이때 군졸 횃불이 절대로 장수 횃불 앞에 가면 안 되고, 장수 횃불이 꺼지면 군졸 횃불도 꺼야 한다.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횃불을 밝힌 체 액을 쫓는 방포 3발을 쏜다. 질병·화재(火災)·천재(天災) 등을 쫓기 위해서이다. 방포가 끝나면 유사 집으로 모두 가서 고사 지낸 음식을 음복하며, 풍물을 치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놀게 된다.
[축문]
현재 전하는 축문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951년 본이다. 1951년 본은 ‘유세차 신묘 정월정축삭 십오일신묘 유학 박영규(朴永圭) 감소고우’로 시작한다. 1951년 본은 『시경(詩經)』·『역경(易經)』·『후한서(後漢書)』 등에 쓰인 많은 고사 성어가 들어 있다. 이는 식자층이 참여했다는 증거가 된다. 1951년 본에 의하면, ‘동신신위전 왈(洞神神位前 曰)’이 ‘감소고우’와 같은 줄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서두 부분이 1954년 본에는 원래의 축원문 본문이 ‘길일혜양신~원세세이건봉’인데 여기에다 덧붙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왈(曰)의 용법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위전에 ‘가로되 왈(曰)’이란 어순상 맞지 않고 ‘동신왈’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