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973 |
---|---|
한자 | 高用賢 |
이칭/별칭 | 자평(自平),야수(野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두헌 |
출생 시기/일시 | 1302년 - 고용현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368년 - 고용현 사망 |
출생지 | 고용현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면 한림동 |
거주|이주지 | 고용현 낙향지 -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한림동 |
묘소|단소 | 고용현 묘소 -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동 월명 공원 옆 설림산 |
사당|배향지 | 고용현 배향지:염의서원 -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염의서원길 156-9 |
사당|배향지 | 고용현 배향지:만화서원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무림리 217-2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제주 |
대표 관직 | 대사성(大司成)|개성윤(開城尹)|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 |
[정의]
고려 후기 군산[옛 옥구현] 지역 출신의 문관.
[개설]
고용현(高用賢)은 군산에 세거한 제주 고씨 출신으로, 고려 원 간섭 시기의 문인 관료이면서 학자였다. 문과에 급제한 이후, 한림시 독학사 등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창고를 지키기 위해 해변에서 육지로 옮기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말년에는 고향인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한림동으로 내려와 살았다.
[가계]
고용현의 일명(一名)은 자평(自平)이고, 호(號)는 야수(野叟)이다. 시호(諡號)는 문영(文英)이다. 12세기 중엽에 옥구에 최초로 입거한 제주 고씨 입향조 고돈겸(高惇謙)의 6세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예빈경을 지낸 고형중(高瑩中)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낸 고정(高侹)이고, 할아버지는 이부 상서를 지낸 고백연이며, 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고경(高慶)이다. 외할아버지는 상서(尙書)를 지낸 황대공(黃代公)[본관은 평해]이고, 장인은 좌상(左相)을 지낸 손기구(孫琦矩)[본관은 충주]이며, 두 번째 부인의 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장익성(張益聖)이다.
[활동 사항]
고용현은 1302년(충렬왕 28)에 태어났다.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시 독학사(翰林侍讀學士), 한림원 직학사(翰林院直學士), 대사성, 개성윤 등의 관직을 지냈다.
충숙왕의 특명으로 김지경(金之鏡), 봉천우(奉天祐) 등과 함께 장전주한(掌銓注翰)을 역임하였다.
충혜왕 즉위년에 공을 세워 대사성이 되었으나 다시 충숙왕이 복위하자 배반한 죄로 투옥되어 장형을 받고 섬으로 유배되었다.
1357년(공민왕 6)에 개성윤으로 복관되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손등(孫登)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58년(공민왕 7) 4월에 왜구들이 한주[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와 진성창을 노략질하자, 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로서 바닷가에 있는 창고를 육지로 옮겼다. 네 임금을 섬기면서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은 거의 한나라의 봉몽(逢蒙)과 은나라의 비간(比干)에 견줄 품격이였었다고 목은 이색은 전한다. 말년에 고향인 옥산(玉山) 한림동(翰林洞) 료화제(蓼花提) 위에 내려와 살았다 1368년(공민왕 17) 겨울에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야은 길재가 쓴 「문영공행록(文英公行錄)」이 전한다고 한다. 『옥구 군지(沃溝郡誌)』[1924] 유현(遺賢) 조(條)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고용현의 묘는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동 월명 공원 옆 설림산 기슭에 매안처가 있다.
[상훈과 추모]
나라에서 문영(文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한림동 염의 서원(廉義書院)과 군산시 나운동 숭모사(崇慕祠), 고창군 신림면 무림리 만화 서원(萬化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