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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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武官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김두헌 |
[정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문반직과 무반직에 임용된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 관인 및 과거 합격자.
[개설]
고려와 조선의 관료들은 문반 관료와 무반 관료로 나뉜다. 조선 시대에는 문반 관료와 무반 관료를 선발하는 각각의 과거(科擧) 시험이 실시되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무반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科擧) 시험은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과거(科擧)가 아닌 취재(取才)만 실시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문무 양반 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조선 시대였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현재의 군산 지역 곧, 옥구현, 회미현[조선 시대에 옥구현으로 병합됨], 임피현 지역에서도 문무 관료가 다수 배출되었다.
특히 옥구현 지역은 고려 시대에는 재상들과 한림원 학사들이 여러 명 배출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다. 그러나 조선 전기를 거치면서 시기가 흐를수록 군산 지역 출신 중에 중앙의 고위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이 고려 시대에 비해 점차 줄어들었다. 그만큼 군산 지역의 사회적 위상도 조금씩 하강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던 보편적인 양상이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시기가 흐를수록 전국적으로 중앙 집권화 양상이 강화되어 갔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내용]
조선 시대에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통로는 과거(科擧)였다. 과거 제도는 고려 시대 광종 때 쌍기의 건의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이래 갑오개혁 때 까지 실시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명경과, 제술과, 잡과가 시행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시행되었다. 문과는 다시 문과와 사마시 곧, 생진시로 구분되었다.
현재 조선 시대 옥구현과 임피현 출신 중에 과거 합격자로 확인되는 자들은 문과 급제자가 12명,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 곧 사마시 합격자가 46명, 무과 급제자가 76명이다. 그러나 과거가 아닌 음서(蔭敍)나 천거(薦擧)로 문무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있었다. 또한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하여서 모두 문무 관직에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합격자는 지방 사회의 대표적인 문무 엘리트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들도 군산 지역 출신의 문무 관직 진출자 안에 포함시켰다. 문무 관료는 될 수 있는 한 문관은 지방의 군수나 현령 등 수령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무관은 첨절제사 등 중견 무관직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다만 국가에 공을 세워 공신에 임명되거나, 군산 지역으로 이주한 입향조이거나, 그 입향조의 처부(妻父) 등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관직보다 위계가 낮은 관직에 진출한 자들도 수록 대상에 첨가시켰다.
[과거 급제자]
조선 시대 군산 지역 출신 과거 합격자 중에서 가계가 찾아지는 자들을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가계를 찾아본 결과 문과 급제자가 12명이었고,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가 36명이었으며, 무과 급제자가 27명이었다. 이들 과거 합격자들 중에 대부분은 조상 대대로 군산 지역에 거주한 가문 출신이었고, 잠시 군산에 머물다 과거에 합격한 이후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거나, 성장 기간 동안만 군산에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한 이후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소수이다.
문과 급제자 12명은 다음과 같다. 1835년(헌종 1) 별시 문과에 급제한 구종록(具鍾祿), 1699년(숙종 25)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1705년(숙종 31)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김우추(金遇秋), 1570년(선조 3)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1591년(선조 24)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문승사(文承泗), 1561년(명종 16)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문승수(文承洙), 1504년(연산군 10)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반석평(潘碩枰), 1401년(태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양권(梁權), 1681년(숙종 7)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오적(吳勣), 1681년(숙종 7)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1년(숙종 17)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이세현(李世賢), 1447년(세종 29)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2년(성종 3) 춘당대시 문과에 급제한 이식(李湜), 1696년(숙종 22)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정동리(鄭東里), 1612년(광해군 4) 증광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1616년(광해군 8)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채겸길(蔡謙吉), 1888년(고종 25)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한 정홍백(蔡弘伯) 등이다.
사마시 합격자 36명은 다음과 같다. 이들 중 사마시에도 합격하고 나서 문과에 급제한 자는 앞서 언급한, 김우추(金遇秋), 문승사(文承泗), 문승수(文承洙), 반석평(潘碩枰), 이세현(李世賢), 이식(李湜), 채겸길(蔡謙吉) 등 7명이다. 그리고 사마시에만 합격한 자는 다음의 28명이다. 1721년(경종 1) 증광시 생원시에 합격한 강성대(姜聖大), 1840년(헌종 6)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고득의(高得義), 1858년(철종 9)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김팔생(金斗八), 1534년(중종 29)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김성두(金星斗), 1555년(명종 10)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남궁두(南宮斗), 1873년(고종 10)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두시재(杜詩在), 1885년(고종 22)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두철수(杜喆秀), 1715년(숙종 41)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문덕관(文德觀), 1666년(현종 7)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문도남(文道南), 1880년(고종 17) 증광시 진사시에 합격한 문정학(文正學), 1639년(인조 17)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문태현(文台鉉), 1864년(고종 1) 증광시 진사시에 합격한 문학인(文學仁), 1783년(정조 7) 증광시 진사시에 합격한 문현도(文顯道), 1507년(중종 2)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반석권(潘碩權), 1504년(연산군 10)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반석정(潘碩楨), 1549년(명종 4)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성봉손(成奉孫), 1549년(명종 4)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성봉진(成奉縉), 1797년(정조 21) 사마시 초시에 합격한 신대양(申大洋), 1501년(연산군 7)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이사검(李思儉), 1669년(현종 10)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장후준(張後俊), 1894년(고종 31)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전상원(田相元), 1850년(철종 1) 증광시 진사시에 합격한 조기순(趙璣淳), 1792년(정조 16)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조동규(趙東逵), 1783년(정조 7) 증광시 진사시에 합격한 조장규(趙章逵), 1879년(고종 16)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채동연(蔡東延), 1835년(헌종 1) 증광시 진사시에 합격한 채윤영(蔡胤永), 1855년(철종 6)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한 한교영(韓永敎), 1652년(효종 3) 증광시 생원시에 합격한 한홍적(韓弘績) 등이다.
무과 급제 사실을 각 무과 단과 방목과 무과 교지를 통해서 알아내고 족보를 통해서 가계가 확인되는 무과 급제자는 총 27명이다. 족보나 기타 다른 자료에 무과 급제자라고 기록되어 있는 자들은 제외시켰다. 이들 27명의 성명과 이들이 급제한 무과 시험은 다음과 같다. 1678년(숙종 4) 증광시 무과에 급제한 강여창(姜與昌),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에 급제한 강진문(姜進文),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급제한 고산수(高山壽), 1584년(선조 17)년 별시 무과에 급제한 고산해(高山海),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급제한 고운룡(高雲龍),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급제한 고유결(高有潔), 1651년( 효종 2) 별시 무과에 급제한 김광휘(金光輝), 1644년(인조 22) 별시 무과에 급제한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한 김율(金嵂), 1773년(영조 49)에 증광시 무과에 급제한 김응호(金應湖), 1651년(효종 2) 별시 무과에 급제한 김의양(金義讓), 1651년(효종 2) 별시 무과에 급제한 김의현(金義賢), 1672년(현종 13) 별시 무과에 급제한 김운룡(金震龍), 1672년(현종 13) 별시 무과에 급제한 김이태(金以泰), 1651년(효종 2) 별시 무과에 급제한 김현룡(金見龍),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한 김확(金鑊), 1651년(효종 2) 별시 무과에 급제한 반몽설(潘夢說), 1580년(선조 13) 별시 무과에 급제한 반혼(潘渾),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급제한 임대년(任大年),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한 전영방(田永芳),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급제한 채세복(蔡世福), 1711년(숙종 37) 식년시 무과에 급제한 채종윤(蔡宗胤), 1651년(효종 2) 별시 무과에 급제한 채후침(蔡後沈),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에 급제한 최상(崔湘), 1636년(인조 14) 별시 무과에 급제한 최지일(崔智一), 1583년(선조 16) 별시 별시 무과에 급제한 최충검(崔忠儉),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 급제한 최한(崔漢),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한 최호(崔湖) 등이다.
[문무 관직 진출자]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문무 관직에 진출한 자들 중에 진출한 관직이 문관은 군수와 현령 이상이거나, 무관은 첨절제사 이상인 자, 그리고 이상의 관직보다 위계가 낮은 관직에 진출하였다 할지라도 공신에 록훈(錄勳)되거나, 입향조이거나, 또는 입향조의 처부(妻父) 등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행적을 남긴 자들 중에서 가계를 찾을 수 있는 자를 골라보니 모두 50여 명이었다. 이들 50여 명은 다음과 같다.
절충 장군(折衝將軍)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며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이었던 강몽벽(姜夢璧), 수문장(守門將)으로서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선무 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된 강몽허(姜夢虛),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며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광산 김씨 경력공파 입향조 김덕양(金德良)의 처부(妻父) 강상주(姜尙周), 해주 판관(海州判官)을 지냈고 소릉 복위를 주청하고 청백리로 유명하며 수운정사(繡雲精舍)를 세운 강응주(姜應周), 선조 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 절제사(節制使), 오위장(五衛將) 등을 지냈고 진무 원종 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강진백(姜進伯), 제주 고씨 옥구 입향조 고돈겸(高惇謙)의 현손이며 이부 상서(吏部尙書), 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를 지냈고, 옥성군(玉城君)에 봉군되었고,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염의 서원(廉義書院)에 배향(配享)된 고경(高慶), 1544년(중종 39) 무과에 급제하였고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고사무(高士武), 군수(郡守)와 목사(牧使)를 지낸 고서(高恕), 1545년(인종 1) 무과에 급제하고 충무위(忠武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고세걸(高世傑), 고려 시대 은자광록 대부(銀紫光祿大夫) 간의 동지(諫議同知)를 지낸 고용현(高用賢), 고려 의종 조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예빈경(禮賓卿), 동궁(東宮) 시독학사를 지낸 고형중(高瑩中), 1526년(중종 21) 무과에 급제한 고흥효(高興孝), 1492년(성종 23) 무과에 급제하고 담양 부사(潭陽府使)를 지낸 김석동(金石仝),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에 금산(錦山) 전투에서 사망한 김성진(金聲振),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세진(金世珍), 군수(郡守)를 지낸 김수담(金壽聃), 1628년(인조 1) 무과에 급제한 후 수문장(守門將),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김려생(金麗生), 무과에 급제하고 진무 원종 공신(振武原從功臣)에 록훈(錄勳)되었으며 전라 우수영 우후(虞侯)를 지낸 김업(金嶪),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을 지낸 김여함(金汝諴), 정언(正言), 담양 부사(潭陽府使)를 지낸 김영보(金永輔),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낸 김윤신(金允信), 음직으로 해주 판관(海州判官)을 지냈고 1597년(선조 30)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김천록(金天祿), 비인(庇仁), 강령(康翎) 현감(縣監) 재임시 선정을 베푼 두사순(杜思順), 1587년(선조 20) 무과에 급제하고 만호(行兵馬萬戶)를 지냈으며,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두정란(杜廷蘭),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 부장(副將)을 지냈으며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두정협(杜廷莢),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전라도 순천성 전투에서 사망한 문계명(文繼明), 양무 원종 공신(揚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문덕신(文德新),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박사후(朴師厚), 충무위(忠武衛) 부호군(副護軍),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낸 반효남(潘孝南), 의주목사(義州牧使),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낸 반희(潘熙), 통예원(通禮院) 인의(引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공릉령 중부, 사직령을 지낸 신영균(申永均), 갑신정변 때에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으로 의병을 규합하고 어가(御駕)를 호위한 신용균(申用均), 선조(宣祖) 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 수문장(守門將),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를 지낸 오경상(吳景祥), 고려 시대 중서 시랑 평장사 판형부사,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임개(林槩), 장사랑(將仕郞)을 지냈으며 양무 원종 공신(揚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임성린(林成麟), 옥구 임씨 시조 임개(林槪)의 아들이며 고려 시대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임유문(林有文),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워 이후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록훈(錄勳)된 임지강(任智綱), 장사랑(將仕郞)을 지냈으며 박필몽의 난 때 공을 세워 양무 원종 공신(揚武原從功臣)에 녹훈된 임치영(林致榮),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을 지냈고 선무 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전언룡(田彦龍),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과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으며 『기문록』과 『성리강설』 등을 저술한 전윤성(田潤成), 오수(鰲樹)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정여립 복주에 공을 세워 청난 원종 공신(淸難原從功臣) 록훈(錄勳)된 채경기(蔡景祺),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인조 때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진무 원종 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채경준(蔡景俊), 생원시에 합격하고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냈으며 권신의 비리를 상소한 후 낙향하여 후진 교육에 힘쓴 채구강(蔡九江),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겸직(兼職)으로 삼도 해운사(三道海運使)를 지낸 채담(蔡潭),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군공을 세워 선무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채몽익(蔡夢翼), 어모 장군(禦侮將軍) 병마 수군 첨절제사(兵馬水軍僉節制使)를 지낸 채심(蔡深), 창신 교위(昌信校尉), 훈련원 판관(行訓鍊院判官)을 지낸 최몽란(崔夢鸞), 충무위(忠武衛)를 지냈으며 인조(仁祖) 조(朝)에 청난 원종 공신(淸難原從功臣)에 녹훈된 최산립(崔山立), 통일 신라 시대 말기의 명문장가이며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 벽동 군수(碧潼郡守),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 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를 지낸 최한정(崔漢禎), 충무위(忠武衛) 부사맹(副司猛)과 용양위(龍驤衛) 사직(司直)을 지낸 최효설(崔孝說), 장사랑(將仕郞)과 사섬시 참봉(參奉)을 지낸 황세우(黃世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