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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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蹴球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조종안 |
전화 | 063-440-0240[군산 제일 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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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http://www.ksjeil.hs.kr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두 팀이 각각 11명씩 한 팀을 이루어 발과 머리 등 손과 팔을 제외한 신체를 사용해 공을 다루는 경기.
[개설]
군산의 축구는 서양 선교사 전킨(W. M. Junkin)[전위렴]이 1902년 지금의 구암산에 설립한 영명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시기 군산의 축구]
1902년 사랑방 교육으로 출발한 영명 학교는 1903년 소학교를 설립하고, 1909년 미국에서 의사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오긍선 박사가 4년제 고등과와 2년제 특별과[대학 과정]를 병설하여 영명 중학교 인가를 받는다. 1911년에는 축구부가 조직된다.
영명 중학교[제일 고등학교]는 교과목에 체육이 있었고, 수업이 끝나면 교사와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축구와 농구 야구 등을 하였으며, 군산 영명 중학교와 광주 숭인 고등학교, 목포 영흥, 순천 매산 등 호남 지역 5개 기독교계 학교들이 교환 경기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축구와 농구는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정구와 야구는 학교에서 배웠다. 그중 축구와 야구는 일본인과 서양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빨리 보급되었다. 일본인이 조성한 군산도 1920년 ‘평화 축구단’이 결성되면서 열기가 더욱 확산되기 시작한다. 군산과 전주는 해마다 두 차례[봄·가을] 경기를 가졌으며 이즈음 이리[현 익산]에서도 ‘솜리 축구단’이 구성되었다.
영명 중학교는 1922년, 1923년 2년 연속 전조선 축구 대회에 출전하였다. 이밖에 1930년대 익산 농림 고등학교, 전주 농림 고등학교, 정읍 농림 고등학교 등 도내 3농(農) 축구 경기가 10여 차례 열렸는데, 영명 학교 출신이자 평화 축구단 소년부를 이끌었던 채금석이 이들 세 학교를 순회하며 선수들을 지도하였다. 이는 군산의 축구가 전북에서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920년대 군산에는 10개가 넘는 축구팀이 자웅을 겨루다 김해욱, 김서봉 등이 팀을 규합하여 단일팀으로 재조직 호남 일대에서 강팀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침체에 빠졌다가 1933년 11월 초 부활하여 단명도 축구 구락부로 바꾼다. 연락처는 군산부 영정 공영 양화점 내에 두고 회원 30명에 간부 6명[김해욱, 김병수, 전서봉, 최상태, 정정산, 김인수 등]을 두고 경비는 회비로 운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