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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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喪禮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집필자 | 박상천 |
성격 | 평생 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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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시기/일시 | 초상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사람이 죽은 후 장사 지내는 예법.
[개설]
상례는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때 수반되는 의례이다. 죽음을 현실로 수용하는 초종례부터 시신을 처리하는 습과 염의 의례,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발인과 매장에 따르는 의례, 상주들이 현실 사회로 복귀하는 매장 후부터 탈상까지의 과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군산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유교식 상례는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가 쓴 『사례 편람(四禮便覧)』 등과 같은 유교 예법서의 규정에 따라 행하여 왔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새마을 운동과 「가정의례 준칙」으로 상례 규범이 간소화되었다. 이후에도 사회·경제·문화적 여건의 변화로 상례의 여러 의례들이 통폐합되는 등 축소되었다.
또한 상복의 착용 문제나 상례 실행의 많은 부분을 대행하는 장의사라는 전문 직업이 생겨나고, 장례식장과 병원[영안실]을 이용하면서 집집마다 예법이 달라서 ‘가가례(家家禮)’로 통칭되던 지역별·문중별 다양성을 지니던 방식이 전국적으로 규격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장례 기간도 3년 상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탈상의 시기도 다양화되어서 삼우제를 지내고 하거나 사십구재(四十九齋)나 백일재 이후에 하기도 한다.
상복 역시 이전에는 오복 제도에 따라 복인들이 입는 상복의 재질이나 봉제법이 각기 달라서 복잡했지만 오늘날에는 두건이나 광목으로 두루마기와 띠 정도만 갖춘다. 이것 역시 손수 만들지 않고 장례업체의 기성복을 사서 쓰게 되었다.
또한 집안에서 임종을 맞이하던 전통 사회에서는 초상이 나면 상가를 중심으로 가족과 친족,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큰일을 치렀다. 그래서 초상에 대비하여 마을마다 상포계를 운영하여 일손을 도왔으나 지금은 대부분 부조로 대신하고 있다.
[절차]
(1) 혼불 나가기
죽으려면 3달 전에 혼불이 나가는 것을 동리 사람들이 보게 된다. 혼자서 보는 경우도 있고 여러 사람이 다 보는 수도 있다. 혼불의 모양이 길게 나가는 것과 둥근 것이 있는데 모양에 따라 별 차이가 없다.
옆집 사람이 꼭 죽게 되었는데 반디 불 같은 불이 크게 빛나며 올라가는 것을 여러 사람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젊은 사람이 죽는 경우에는 볼 수 없고 오래 산 노인이 죽을 때 혼불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혼불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그 집에 알려줄 수는 없다. 여우가 그 집을 향하여 짖거나 집 앞에서 짖는 경우가 있으면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2) 임종
임종 시 남자가 죽을 때에는 여자가 만질 수 없으나 여자가 죽을 때에는 남자가 만질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고 친척만이 모여 보는데 대개 유언을 한다고 한다. 이때는 가정 이야기를 중심으로 잘들 살라고 유언을 한다.
숨 떨어지는 것을 “운명”이라 하며 눈을 뜨고 운명을 하면 큰아들이 눈을 감겨준다. 눈을 뜨고 죽을 때는 보고 싶은 자손을 보지 못한 것을 비롯해 어딘가 못 잊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본인이 와서 감겨주거나 그 사람이 계속 오지 않을 때는 큰아들이 감겨준다.
(3) 수족 걷기
죽은 사람을 그냥 두면 시신이 굳어지기 때문에 수족을 묶어 두어야 한다. 동네에 친한 사람이나 할 줄 아는 사람이 하게 되는데 백지로 꼬아서 끈을 만들어 다리를 펴놓고 발을 묶고 다른 한쪽으로는 두 손을 배위에 올려서 묶은 다음에 손과 발을 걸어서 발끝이 일어서도록 팽팽하게 맨다.
방바닥에 칠성판이 닿지 않게 비개를 상, 중, 하 세 곳에 놓고 위에 칠성판을 올려놓은 후 시신을 올려놓는다. 송판이 없기 때문에 보통 대나무를 5~6개 엮어서 사용한다. 집의 좌향에 따라 머리를 동쪽에 뉘인 다음 칠성판 위에 놓고 홑이불로 덮어 놓는데 여기까지를 “수족을 거둔다”라고 한다. 수족을 거둔 다음에는 병풍을 쳐놓는다.
(4) 혼 부르기
시신을 홀로 아무도 없이 방에 두고 나와서 혼을 부르게 되는데, 이것을 하는 사람은 따로 정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줄 아는 집안사람이 하게 된다. 시신이 있는 방 바로 지붕위로 평소에 죽은 사람이 입던 홑적삼을 지붕위로 던지면서 어디어디 사는 누구 씨 복, 복, 복이라 외친다.
(5) 사자밥
사리문 밖 앞쪽에다 짚을 십[+]자로 깔아 놓고 위에다 물 한 동이를 떠다 놓고 짚 세기 세 켤레를 갖다 놓는다. 그리고 상에다가 밥 세 그릇과 물 세 그릇을 올려놓고 반찬은 놓지 않는다. 죽은 자의 여비로 쓰라고 돈을 올려놓기도 한다.
사자밥을 놓고 나면 친척들은 상제들의 비녀를 뽑고 머리를 풀어주게 되며 절을 두 번하고 곡을 정식으로 하게 된다. 남자는 두루마기를 왼팔을 빼서 입고 여자는 저고리의 오른쪽 팔을 뺀 채로 입는다. 돌아간 사람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는 이때 뺀 것을 보아 곧 알 수 있다.
(6) 부고
부고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에 대한 신원과 일자를 적어 친척과 친지들에게 보내게 된다. 그리고 호상을 정하는 데는 상주가 처음 만나는 사람으로 정하는 게 상례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이 호상으로서 부적당할 때는 이름만 빌려 주거나 다른 사람으로 바꾸게 된다. 호상은 상례에 있어서 일체의 사무를 관리하게 된다.
(7) 상복과 수의
수의는 살아있을 때 입는 식으로 모든 종류의 옷을 하게 되는데 미리 죽을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놓기도 한다. 상복을 만들 때는 되도록 가위를 적게 사용하여 너덜너덜 하게 만든다. 단을 접어서 만들지도 않고 들어가고 나가는 모양에 따라서 접어 만들며 마름질을 하지 않는다.
상주들이 짚는 상정막대기는 남자가 죽은 경우에는 대나무이고 여자가 죽은 때에는 오동이나 버드나무를 사용하는데, 이는 남자는 마디와 때가 있어서 대나무를 쓰고 여자는 살결에 따라서 그렇게 쓴다는 것이다.
(8) 조문
수족을 거둔 후에 마루에 평상을 놓고 거적을 엮어서 사방을 막아 치고 그 안에 앉되 아버지가 돌아갔으면 왼팔을 뺀 채 옷을 입고 앉았는데, 동네상이 나면 동네는 곧 알아서 모여들지만 먼 데 사는 사람에게는 부고를 내면 모인다.
부고를 보고 찾아오는 문객이 왔을 때 내간상이면 상주하고만 인사를 하고 명인과 친한 사이가 되면 시신 앞에 곡을 하고 두 번 절을 한 후에 상주와 인사를 한다. “천붕지통을 당했으니 얼마나 애통하시나” "상사를 당했으니 얼마나 애통한가”라고 조문하면 상주는 고개를 숙이고 “그냥 오시느라고 욕보셨다”고 답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9) 염 (殮)
자손과 친척이 모두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보통 2~3명의 할 줄 아는 사람이 행한다. 병풍을 젖히고 홑이불을 걷은 다음에 칠성판 위에서 내려놓고서 옷을 아래부터 벗기는데 백지로 덮어 살이 보이지 않게 가려가면서 벗긴다. 신체가 완전히 나체가 되지 않게 벗기는 동시에 새 옷을 입히는 식으로 한쪽을 빼면 곧 새 옷을 입힌다.
염을 할 때 옷을 입히고 얼굴을 덮을 때 특별히 행하는 의식으로는 백미를 넣으면서 천 석, 이천 석, 삼천 석이라 하거나 동전을 넣으면서 일천 냥, 이천 냥, 삼천 냥이라 하는 것을 들 수 있는데, 구멍 뚫린 동전을 피하고 일전(一錢)이라고 써있는 문자(文字)를 마련시켜서 넣는다.
염하는 중에는 곡을 하지 않고 말도 되도록 피하게 되는데 얼굴을 덮을 때만은 예외이다. 관을 덮은 다음에는 관을 비단, 공단으로 싸는데 가난한 사람은 기름종이로 싸기도 한다. 관을 다 싼 다음에 칠성판을 올려놓았던 곳에 관을 오려놓고 명정을 방문 앞에 걸면 염하는 과정이 끝난다.
(10) 성복(成服)
염이 끝나면 상제들은 세수를 하고 상복을 입게 되는데, 이것을 성복이라고 한다. 마루에서 옷을 입고 마루에다 제상을 차리면서 상제들은 방에서 뜰로 나오게 된다. 즉 성복 전에는 산사람의 자격으로 인사를 받고 성복 후에는 죽은 사람으로서 인사를 받는 셈이다. 마루에다 제상을 차리고 성복제를 지내게 되는데 대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11) 상여놀이
빈 상여를 메고 마을의 어귀에서나 상가집 마당에서 노는 것으로 출상하기 하루 전에 논다. 다음날 상여를 멜 사람을 뽑기 위해서 행하게 된다는 상여놀이 때에는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내놓는데 실제 상여가 나갈 때처럼 상여소리를 하면서 논다.
(12) 발인
아침에 상식을 올린 후에 상여꾼이 오면 상여꾼들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나서 시작되는 것으로, 방에 있는 신체를 상여에 옮겨놓고 이제 집에서 완전히 떠나는 발인제를 올린다.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은 광목 끈에 들려 방에서 마당에 있는 가마 쪽으로 나온다.
이때에 하는 풍습으로 박바가지를 방문 밖에 엎어서 놓았다가 관을 들고 앞에 나오는 사람이 세게 밟는 것이 있다. 이는 바가지 깨지는 소리에 놀라서 귀신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집에서는 관을 모셔놓은 방의 사면에 바다 해(海)자를 붙여 놓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망망대해 (茫茫大海)이므로 귀신이 근접할 수 없다는 데서 그렇게 한 것이다.
(13) 출상
상여가 나갈 때는 상여의 바로 뒤에 죽은 사람을 슬퍼하는 내용을 담은 헝겊이나 비단으로 만든 만사가 따르고, 그 다음에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명을 적은 명정, 관을 닦는데 사용하는 공포가 따른다.
(14) 평토제
다른 말로 봉분제, 성분제라고도 부르는데, 관을 땅속에 파묻고 봉분이 만들어지면 음식을 잘 차려서 제사를 지낸다.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썼던 것을 쓰기도 한다.
(15) 삼우제
평토제가 끝나면 영호에 죽은 사람의 동정을 뜯어 삼베로 싸서 만든 혼백을 넣고 이것을 두 사람이 메고 집에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서는 마루에 제청을 모시고 여기에 혼백을 안치하는데 여기에 매식 상식을 올린다. 출상 후 3일이 되는 날 산소를 찾아보고 상례에 힘쓴 여러 사람과 동네 사람을 불러서 음식을 먹인다.
(16) 탈상
남편이 생존하고 여자가 먼저 죽을 때는 만 1년 만에 탈상을 하고 음력 10월 15일이 어머니 제삿날이면 100일을 앞두고 지낸다. 1년 탈상과 3년 탈상이 보통으로 탈상 때에 탈복을 하게 되는데, 물 한 동이를 떠놓고 불을 피워놓은 다음 큰아들부터 옷을 벗겨주어 불에 두른 다음 물에 담가내는 식으로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군산 지역에서는 상례에 대비해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상여가 있었으며 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상례를 치렀다고 한다. 상이 나면 부고를 직접 쓰거나 인편을 통해 알렸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고와 더불어 마을 이장이 안내 방송을 통해 알렸다고 한다.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지역 역시 상례 절차에 있어 특별한 점은 없으나 특이한 점은 상이 나면 동네에 있었던 각설이들이 상례에 훼방을 놓지 못하도록 달래는 차원에서 각설이들을 불러다가 가장 먼저 배부르게 먹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