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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004
한자 華城-三一運動-提巖里·古州里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혜린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1919년 일어난 3·1운동과 일제의 제암리·고주리 민간인 학살 사건.

[개설]

1919년 3월 1일의 만세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 갔다. 그중에는 평화적인 시위도 있었지만,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진행된 시위도 있었다. 화성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전국에서 몇 안 되는 대표적인 공세적 만세 시위 운동으로, 3·1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례이다. 주민 대다수가 참여한 대규모의 시위가 여러 날에 걸쳐 일어났고, 두 명의 일본인 순사가 처단되었으며,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가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일제는 군경을 파견하여 잔혹한 보복과 비인도적 탄압을 벌였고, 제암리·고주리 민간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역사로 이어졌다. 화성의 3·1운동제암리·고주리 사건은 언더우드, 스코필드 등과 같은 기독교 선교사와 미국 총영사관, 영국 총영사관 등의 외교 라인을 통해 증언, 사진, 언론, 보고서 등의 형태로 국제 사회에 전해졌다.

[송산 지역 3·1운동]

송산면의 만세 시위 운동은 홍효선(洪孝善), 홍면옥(洪冕玉), 이규선(李奎善) 등이 중심이 되어 계획하였다. 세 사람은 구장 집에 모여 세금을 납부하는 날인 3월 26일을 거사일로 삼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홍윤일(洪允日) 등을 통하여 3월 26일에 만세 운동이 있을 것이라고 알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참석을 독려하였다. 3월 26일 오전 9시경 사강리 구장 홍명선(洪明善)의 집에 호세(戶稅)를 납부하기 위해 120명 정도가 모였다. 홍효선은 주민들에게 다른 마을에서도 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우리도 만세를 부르자고 외쳤다.

홍면옥, 홍효선 등의 주도로 주민들은 사강리 송산면사무소로 향하였고, 왕광연, 홍명선, 홍봉근, 홍복룡, 홍준옥, 김교창, 김도정, 김용준, 차경현, 이순일, 이윤식 등 15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다음 날인 3월 27일에도 송산면 서쪽 육일리 방면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고, 면사무소 뒤 언덕에 사람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사강리 경찰관주재소 순사보가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가자 주민들은 자진 해산하였다. 시위가 연달아 일어나자 수원경찰서에서는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와 정인옥(鄭仁玉)을 파견하였다.

3월 28일은 사강 장날이라 마을 사람들이 장터로 모여들었다. 오전 10시 사강 장터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고, 홍면옥, 이규선, 홍효선 등은 송산면사무소 뒷산으로 가서 인근 마을 사람들을 모았다. 이때 약 1,000여 명의 군중이 국권 회복을 위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를 탄압하기 위해 출동한 노구치는 홍면옥, 이규선, 예종구 등 3명을 잡았는데, 홍면옥이 갑자기 일어나서 만세를 불렀다. 노구치는 총을 발포하여 주민들을 해산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홍면옥이 어깨에 총상을 입으면서 사태가 심각하여졌다. 홍면옥은 동생 홍준옥에게 업혀 송산면사무소에서 응급조치를 받았고, 홍면옥, 홍준옥, 홍효선, 예종구 등은 면사무소 안팎에 모인 주민들에게 노구치를 죽이라고 호소하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노구치를 처단하고자 하였고, 놀란 노구치는 자전거를 타고 도망갔다. 왕광연, 홍명선, 홍남후, 홍문선, 홍관후 등이 노구치에게 돌을 던져 자전거에서 떨어지게 하였고, 군중들이 노구치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면민 대다수가 참여한 장안·우정 지역 3·1운동]

우정면장안면은 일찍이 동학이 전파되어 1910년에 이미 천도교 남양교구 산하에 8개의 전교실이 있던, 천도교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또한 기독교도 전파되어 1905년을 전후로 수촌리, 장안리 등에 교회가 있었고, 장안리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있었다. 3·1운동에 대한 소식은 일부 인사들에게 교단 조직을 통해서, 혹은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 인물들을 통해서 알려졌다.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온 백낙열(白樂烈)[장안면 수촌리], 김성열(金聖烈)[팔탄면 고주리], 안종후(安鍾厚)[향남면 제암리] 등은 비밀리에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도사였던 백낙열은 관하 전교실을 돌며 거사를 협의하고 연락을 취하였다. 또, 한편으로 각 마을의 구장도 주민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장들은 4월 3일 시위 당일 독정리 구장 최건완의 집에서 회합하였다. 석포리 구장 차병한, 수촌리 구장 백낙열이 시위를 주도하였고, 사환을 시켜 집마다 연락하여 주민을 동원하고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4월 3일 아침 일찍 장안면사무소를 향해 시차를 두고 동리별 집결이 이루어졌다. 첫 집결지는 장안면 석포리였다. 석포리 뒷산에 북을 걸어놓고 둥둥 북을 치며 주민들을 모았다. 우정면 주곡리 주민들은 이치덕(李致德), 장순명(張順明), 차봉습(車奉習), 장봉래(張鳳來)의 인도하에 석포리로 왔다. 석포리주곡리 주민들은 합류하여 장안면사무소로 갔고, 수촌리 주민들은 밀양산에서 100명 정도 집결한 후,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안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주민들이 장안면사무소에 집결한 뒤, 차병한차병혁은 면사무소에 들어가 면장 김현묵에게 시위에 참여하라고 하였다. 면장이 만세를 연호하자며 먼저 만세를 부르자, 일동은 그에 호응하였다. 군중은 몽둥이 또는 돌로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사무소 내에 비치된 서류와 집기를 훼손하였다.

시위대는 이어 장안면우정면 사이에 있는 쌍봉산으로 갔다. 모인 사람은 600~700명이었고, 이영쇠의 선창으로 만세를 부르고 우정면으로 출발하였다. 군중은 점차 불어나 1,500명에 이르렀다. 시위대가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1,500명의 군중은 우정면사무소의 유리창을 깨고 돌이나 몽둥이로 부수었으며, 장부와 서류를 다 태웠다. 정순영은 "힘이 있는 한 움직여야 한다. 오늘이 밥을 먹는 마지막이다"라고 부르짖으면서 기세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시위대는 화수리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우정면사무소에서 화수리 주재소까지는 북쪽으로 3㎞ 떨어진 한각리에서 1㎞를 더 가야 하였다. 면장 김현묵은 누군가의 권유로 "지금부터 주재소를 습격한다. 순사가 총을 쏘아 죽는 사람이 있더라도 시체를 타고 넘어서 주재소에 뛰어들어 파괴 방화하고 순사를 때려죽이라"라고 연설하였다. 이에 군중은 둘로 나뉘어 원형으로 진을 치고,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십여 명이 주재소 앞뜰로 들어가고, 일부는 뒤쪽으로 가서 사무실 뒷벽을 부수고 불을 붙였다. 이때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가 뛰쳐나와 권총을 발포하였고, 장안면 사곡리이경백(李敬伯)이 맞아 순국하였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가와바타 순사를 추격하였고, 정서성, 이영쇠, 이순모, 차인범 등이 몽둥이로 가와바타를 구타하였다. 화수리주재소는 모두 불탔고 가와바타 순사는 사망하였다.

장안·우정 지역 만세 시위 참여 인원에 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2,000여 명이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장안·우정 지역 주민의 대부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석포리, 주곡리, 수촌리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장안·우정 지역의 만세 시위는 천도교, 개신교, 유교, 천주교 등 주요 종교 세력이 일치단결하여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항쟁에 참여한 배경에는 일제의 수탈과 강제 동원이라는 현실 문제가 있었다. 당시 장안면 석포리에는 개간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간석지 매립에 주민들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중 속에서 ‘면장을 간사지에 쳐 넣고 밟아 죽여 버리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일본인들의 사적인 개간과 간척이 빈번히 이루어지면서 주민들이 입는 피해와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향남·팔탄 지역 3·1운동과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

향남·팔탄 지역의 3·1운동향남면 발안 장날에 이루어졌다. 장날인 3월 31일 발안장에서 약 1,000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일본인 거주지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시위는 다음 날까지 이어져 4월 1일 발안장 주변 산 80곳 이상에서 봉화에 불을 붙이고 ‘일본인은 나가라’는 요구를 하였다. 일본 여성과 아이들은 약 3리 정도 떨어진 삼계리로 피신을 갔고, 일본인 남자들은 무장을 하고 경찰을 도와 밤낮으로 수비를 하였다.

4월 3일 장안·우정 지역의 만세 시위를 접한 향남·팔탄의 주민들은 발안 장날을 이용해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4월 5일 발안 장터에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세를 불렀고, 인근 제암리고주리 주민들도 주재소로 몰려와 투석전을 벌이며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를 탄압하기 위해 수원수비대 30명이 출동하여 주재소를 에워쌌고,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 순사들도 칼을 빼 들고 수비대 사이에 배치되었다. 시위대와 수비대가 대치하던 와중, 수비대가 휘두른 칼에 이정근과 김영태가 쓰러졌고, 팔탄면 주민 김경태는 즉사하였다. 이정근과 김영태는 주재소로 끌려왔는데, 이정근은 부상이 악화되어 그날 사망하였다. 체포된 이들은 고문을 당하였으며, 이봉구는 고문 후유증으로 수원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는 만세 운동에 신속히 대응하였다.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일어난 시위로 일본군은 증원을 요청하였고, 천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79연대가 병력을 파견하였다. 수원경찰서에서도 별도로 검거반을 편성하여 대대적인 검거에 돌입하였다. 경성헌병대장 겸 경기도 경무부장 시오사와[鹽澤義天]는 경무부 경시 하세가와[長谷川部巖] 대위에게 11명으로 편성된 헌병·경찰 혼성 부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4월 2일부터 4일간 원곡, 양성, 안성, 발안, 수촌 등지에서 시위 참여자 및 주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4월 3일 장안·우정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다시 서울에서 헌병부관 쓰무라[津村勇] 이하 21명을 증원하였다. 이렇게 32명으로 편성된 특별검거반은 4월 9일부터 오산, 발안, 우정, 장안, 남양, 팔탄, 사강, 수원 등지에서 시위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부대는 시위 진압 명령을 받고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 인솔하에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하였다.

4월 15일 발안 장날 약 400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아리타 중위는 3월 28일 송산면에서의 노구치 순사부장의 참살과 4월 3일 우정면에서의 가와바타 순사 참살의 화근이 기독교도와 천도교도라고 보고 이들을 소멸시켜 화근을 끊겠다고 출동하였다. 4월 15일 오후 4시경 발안장에서 2㎞ 정도 떨어진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아리타 중위 이하 보병 11명은 경관과 협력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마을 주민 20여 명을 기독교회당에 소집하였다. 모인 주민 대부분은 기독교도와 천도교도였다. 아리타는 훈계를 한 후 교회당을 나가서 세 번의 호령을 하였고, 입구에 있던 병사들이 교회당 안으로 총을 발사하였다. 또한 교회당과 민가에 방화하여 마을 전체를 불태웠으며, 도주하던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거나 칼로 베어 죽이기도 하였다. 제암리 33채 가옥 중 31채가 잿더미가 되었고, 마을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제암리를 폐허로 만든 아리타는 다시 곧바로 팔탄면 고주리로 향하였다. 고주리제암리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가까운 마을이었다. 고주리 주민들은 제암리의 참변을 보고 대부분 산속으로 피신하였지만, 발안 장날 만세 시위를 주도한 김흥렬 일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수비대는 김흥렬의 집에 들이닥쳐 김흥렬을 비롯한 일가족 6명을 포박하고 백낙열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김흥렬이 대답하지 않자 김흥렬김흥렬의 가족을 짚단과 나무로 덮어놓고 석유를 뿌려 생화장을 하였다.

[제암리·고주리 사건의 증인들]

제암리·고주리 사건이 있고 바로 다음 날인 4월 16일,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선교사를 비롯하여 미국 부영사 커티스[Raymond Curtis], AP통신 경성 특파원 테일러[A. W. Taylor]가 제암리를 찾았다. 사건에 관한 조사를 행한 후 언더우드는 ‘일본군이 갑자기 나타나 기독교인을 모두 교회에 집합하라고 명령한 후 방화, 학살하여 30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진술서를 작성하였다. 4월 21일 커티스는 언더우드의 진술서가 포함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 영사 베르그홀쯔[L.A. Bergholz]에게 제출하였다. 베르그홀쯔는 4월 23일 ‘제암리에서 37명의 기독교도가 일본군에 의해 참살당하였다’고 본국에 알렸다. 4월 19일에는 노블 선교사 및 로이즈 영국 대리영사, 케이블 선교사 등이 연이어 제암리를 찾았다. 미국총영사관뿐만 아니라 영국총영사관에서도 현지 조사를 행하면서 제암리·고주리 사건은 외교 라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4월 17일에 ‘일본군이 기독교인들을 교회에 가둔 뒤 집중 사격하여 모두 부상을 입히거나 죽였고, 그 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 건물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다음 날인 4월 18일 수원행 기차에 올랐다. 스코필드는 경찰의 저지를 피하고자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 제암리·고주리 사건을 조사하였다. 이후 「제암리 대학살 보고서」를 작성하여 학살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였는데, 제암리에서 교회에 모인 남자 23명과 여자 2명 등 25명, 고주리에서 6명이 희생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일본 군경에 의한 제암리·고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이 외국 언론에 알려진 것은 1919년 4월 28일 자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 보도에 의해서였다. 뉴욕타임즈 기사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이 독립운동을 탄압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도하며, '서울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는 언더우드 씨가 4월 16일 팔탄면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 기술한 내용'이라고 하였다. 언더우드의 진술서 및 커티스가 작성한 보고서, 스코필드의 보고서에는 그들이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불타버린 교회와 시체들의 모습이 생생히 해외 언론에 소개되었다. 제암리·고주리 사건은 잔혹한 일본의 식민 지배와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적 사례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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