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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632
한자 宋匡補
영어음역 Song, Gaung-b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낙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
성별
생년 1353년연표보기
본관 진천(鎭川)
대표관직 예부상서

[정의]

고려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천(鎭川). 찬화공신(贊化功臣) 상산백(常山伯) 송인의 7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송지백(宋之伯)이고, 아버지는 평리(評理)를 지낸 송소(宋玿)이다. 형제로는 전서(典書) 벼슬을 지낸 송광우(宋匡祐), 낭장(郎將)이었던 송광도(宋匡度)가 있다. 송광보안성군(安城君)에 봉해지고, 그 후손들은 안성공파로 분파하였다.

[활동사항]

송광보(宋匡補)[1353~?]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올라 예부상서에 이르렀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학행이 탁월하여 왕의 사랑을 받았다. 하루는 왕이 주연을 베풀고 “경의 선조 상산백 송인인종 때의 명신으로 왕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니, 경도 짐을 잘 보필하여 부진한 국세를 만회하도록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정몽주도 왕을 잘 보필할 만하다고 칭찬하였으며, 이 기회로 둘 사이의 친교가 두터웠다고 한다.

1392년 4월 정몽주이방원에게 피살된 후 정도전에게 모함을 받아 안성군사로 쫓겨났다. 그 후 7월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3일간 두문불출하고 개경을 향해 통곡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지금의 진천군 덕산읍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고려의 멸망을 비탄하면서 가야금을 타거나 독서로 조용하게 살았다.

태조 이성계송광보의 재주와 덕을 알고 수레와 말을 사자(使者)와 함께 보내어 중앙으로 불렀으나, 송광보는 이를 거부하면서 사자에게 “만약 강제로 따를 것을 명령하면 이 몸을 황해에 던져 고기밥이 되리라”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성계송광보의 굽힐 줄 모르는 절개를 꺾지 못하고 안타까워하였다.

[묘소]

묘소는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에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21 읍 승격에 따른 행정지명 수정 덕산면 -> 덕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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