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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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錫鼎 |
영어음역 | Choe Seokjung |
이칭/별칭 | 석만(錫萬),여시(汝時),여화(汝和),존와(存窩),명곡(明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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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646년 |
몰년 | 1715년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관직 | 영의정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증조할아버지는 최기남(崔起南)이고, 할아버지는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며, 아버지는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 최후량(崔後亮)이다.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응교(應敎)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최석정(崔錫鼎)[1646~1715]은 지금의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9세에 이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암송했고, 12세에 『주역(周易)』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불렸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와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에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하였고,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장원하는 한편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26세인 1671년(현종 1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림회천(翰林會薦)에 뽑혀 사관으로 활동하다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동안 문한직으로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예문관봉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 허견(許堅)의 옥사로 남인(南人)이 대거 정권에서 탈락한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병조정랑·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689년(숙종 15) 장희빈(張禧嬪)의 등장과 더불어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까지 승정원승지·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홍문관제학을 역임하였다.
1685년(숙종 11) 사학 유학생들이 이른바 『명재의서(明齋疑書)』가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모함하여 욕했다고 비난하자 윤선거(尹宣擧)의 강도(江都) 사건[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평민 복장으로 변복하고 탈출한 일]이나 이이의 입산(入山)[불교에 입문한 것을 의미함]한 잘못은 똑같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홍문관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이던 명재(明齋) 윤증(尹拯)을 옹호하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을 논척하였다가 한때 파직되었다.
또한 1687년(숙종 13)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심각해지자 윤선거를 옹호한 나량좌(羅良佐)의 견해를 지지함으로써 노론(老論) 세력의 지탄을 받았다. 1686년(숙종 12) 조선인이 청나라의 국경을 넘어 들어간 사건이 국제 문제로 비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호조참판으로서 부연(赴燕)하였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고대 중국에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장치]을 수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장희빈에 대한 총애 문제를 들추어 낸 이세구(李世龜)를 옹호하고 청류(淸流)로 지칭되는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들을 힘써 선발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안동부사·연안부사를 역임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물러났다. 1694년(숙종 20) 남인 정권이 몰락하고 소론 정권이 성립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한성판윤·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장희재(張禧載)를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홍문관대제학·이조판서에 임명된 뒤에는 서얼 출신을 삼조(三曹)에 소통하자는 건의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7년(숙종 23) 우의정에 올랐고,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들의 일부 서용을 주장하는 입장을 개진하여 노론 세력의 강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단종 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1699년(숙종 25) 좌의정이 되어서는 대제학을 겸임하면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속편을 편찬하고,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증보하도록 하였다.
1701년(숙종 27) 영의정이 되었으며, 이때 김장생(金長生)의 문묘 배향 논의가 일어나자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며 반대하였다. 이해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고 장희빈에 의한 무고(巫蠱)의 변이 일어나자 왕세자 보호를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賜死)해서는 안 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붕당 문제보다 도학(道學)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는데, 그 이유로 파직되어 유배 명령이 내려졌다가 다음 해 석방되어 진천의 향리에 거주하였다.
이듬해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이 되었는데, 이후 노론·소론의 격렬한 당쟁 속에서 소론을 이끌며 1710년(숙종 36)까지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이후 노론 세력이 대보단(大報壇)을 세우면서 의리론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을 공격하자 이를 변호하였다. 이해에 영의정으로 내의원도제조를 겸하다가 왕의 병환에 시약(侍藥)을 잘못한 책임으로 삭직되었다. 이듬해 복관되어 다시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향리인 지금의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에 돌아가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1715년(숙종 41) 기사(耆社)[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해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했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나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들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조부의 학문을 계승하여 정제두(鄭齊斗)와 함께 당시 배척을 받고 있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다.
[학문과 사상]
조부인 최명길의 외주내양(外朱內陽)[겉으로는 주자학을 추종하면서도 속으로는 양명학을 긍정함]적인 탈주자학풍(脫朱子學風)을 계승하였으며, 일찍이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자극받아 왕수인(王守仁)의 『전습록(傳習錄)』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양명학을 공부하였다. 조부는 양명학자가 아니라고 역설하면서도 왕수인을 ‘양명자(陽明子)’로 부르는 등 외주내양의 학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도 이 시기 노론의 경직된 학문 풍토에서 벗어나 주자(朱子)의 설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를 전개할 수 있었다.
최석정이 일찍이 찬집(纂輯)한 『예기유편(禮記類篇)』에 정주(程朱)가 정한 것과 다른 점이 많아 노론의 거센 공격을 받았던 까닭이었다. 1709년(숙종 35) 홍문관에서 이 책을 간행하기로 했으나, 승지 이관명(李觀命)과 성균관 유생 이병정(李秉鼎) 등으로부터 주자를 배반하였다는 비난을 받아 결국 판본이 소각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음운학(音韻學)에도 정통하여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 등을 찬집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명곡집(明谷集)』 36권이 있으며, 『경세정운도설』을 편찬하였다. 편서로는 『좌씨집선(左氏輯選)』·『운회전요(韻會箋要)』·『전록통고(典錄通考)』·『예기유편』 등이 있다. 각석(刻石)으로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에 있던 지산서원(芝山書院) 뒤편에 새긴 금곡리 옥천병자(琴谷里玉川屛字)가 있고, 비문으로는 경기도 양주시에 ‘영상유상운갈(領相柳尙運碣)’, 충청북도 청주시에 ‘영상최명길비(領相崔鳴吉碑)’, 경기도 과천시에 ‘형판장운익비(刑判張雲翼碑)’, 경기도 파주시 장단에 ‘전우석비(全禹錫碑)’ 등이 현전한다. 『야승(野乘)』을 집대성하고자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전주최씨 집성촌]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지금은 훼철된 지산서원에도 제향되었으며,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청원 문정영당에 최석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