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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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彦淳 |
이칭/별칭 | 경명(景明),태소재(太素齋)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연승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에서 활동한 효자.
[가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경명(景明), 호는 태소재(太素齋). 할아버지는 의정부우참찬을 지낸 유명웅(兪命雄)이고, 아버지는 공릉참봉 유묵기(兪黙基)이다.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군수 이명승(李明升)의 딸이다.
[활동사항]
유언순(兪彦淳)[1715~1748]은 7세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음에도 장례를 치르는 태도가 어른과 같았으며, 슬퍼함이 지나쳐 병을 얻을 정도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조씨(趙氏) 슬하에서 자랐지만, 계모에게도 효성을 다하였다. 계모 조씨 또한 유언순을 애지중지하였다.
끼니도 잇기 어려운 집안 형편에 주경야독하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부모를 모시는 데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으며 살폈으며, 출타를 했다 돌아오면 반드시 인사를 올리는 등 한 치의 부족함이 없었다. 16세 되던 해 아버지가 병이 나자 약 달이는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하였다.
하루는 의원이 오서각(烏犀角)[코뿔소의 뿔]이 아버지의 병환에 좋다고 했으나 구하기 힘든 약이라 근심하며 돌아오는데 홀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무엇 때문에 걱정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약을 구할 수가 없어서 근심이라고 대답하자, 자신의 도포 소매 속에서 오서각을 꺼내 주었다.
좋은 약을 구하기 위해 깊은 산중을 헤매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어렵게 구한 약을 직접 달여 정성을 다해 드시게 했다. 밤낮으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며 잠을 잘 때도 목침으로 이마를 고이고 앉아서 잠을 자니 양쪽 미간이 모두 벗겨졌다. 또한 삼년간이나 대소변을 받아 내고 병에 좋다는 약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아버지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는 등 극진한 효성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으며, 계모 조씨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자 매번 말려 죽음에서 구했다. 그리고 누이와 서조모(庶祖母)[할아버지의 첩]로 하여금 계모 조씨를 잘 살피도록 하였다.
계모 조씨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몸소 머리를 감겨 드리고 이를 잡아 드리는 등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계모가 병을 얻었음에도 가난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자, 뜰아래 단(壇)을 쌓고 식음을 전폐한 채 23일을 주야로 울면서 하늘에 기도를 드린 덕분에 병이 완쾌되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에 있었다. 현재는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2010년 초에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유언순의 지극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04년(순조 4) 효자 통덕랑(通徳郎)으로 명정(銘旌)되었다. 1822년(순조 22) 경향 각지의 유림들이 상소를 올려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 148-2번지에 유언순 효자문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