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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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行官民被襲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현석 |
성격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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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단체 |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정지용|정의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82년 7월 20일 -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 관민 피습 사건 발생 |
발단 시기/일시 | 1882년 7월 19일 - 임오군란 발발 |
전개 시기/일시 | 1882년 7월 20일 -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 공사가 공사관원들과 함께 인천 도호부로 피신 |
전개 시기/일시 |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 조약 체결 |
발생|시작 장소 | 인천도호부 관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
[정의]
1882년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본 공사가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도호부 관아에 머물다가 병사들에게 습격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1882년 7월 19일 훈련도감(訓練都監) 군인들이 난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하고 일본공사관을 포위·공격한 사건을 임오군란이라고 한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13개월이나 밀렸던 급료로 받은 쌀이 정량이 아닌데다가 대개는 물에 잠겨 썩어 있거나 모래와 쌀겨가 섞여서 나오자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한 데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의 차별 대우와 쌀값 폭등, 권력자들의 부정부패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 있었다.
[경과]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해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자, 당시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7월 20일 공사관원 28명과 함께 탈출하여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었던 인천도호부 관아에 도착하였다. 당시 인천 부사였던 정지용은 서울에서 발생한 임오군란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해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을 환대하여 맞아들였다. 그러나 곧이어 임오군란의 주동자 중에 한 명이었던 무위영 군졸 정위영 등이 인천도호부에 도착해 흥선 대원군의 밀지를 전달하자 인천도호부 병사들이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을 포위·습격하였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은 다시 인천도호부 관아를 탈출하여 제물포를 거쳐 월미도로 도망간 후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선박 플라잉 피쉬(Flying Fish) 호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결과]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일본에 귀국한 후 전권 위원으로 임명되어 1882년 8월 12일 병력을 인솔한 채 제물포를 거쳐 서울로 들어와 임오군란의 책임자 처벌과 일본 공사관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와 일본은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피해에 대한 배상금 지급과 일본군 주둔권 등에 대한 조항에 합의하였고, 같은 날 조일 수호 조규 속약을 조인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오군란 은 개항 후 가속화된 일본의 침략 정책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후 체결된 조일 수호 조규 속약은 개항장을 기점으로 한 내지 여행권을 규정함으로써 이듬해 개항하는 인천항의 일본 상인들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를 자유롭게 시장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인천 개항 직전 발생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 관민 피습 사건은 그러한 점에서 인천 개항을 전후한 시기 인천이 겪었던 시대적 혼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