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1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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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歲畵 |
이칭/별칭 | 문배(門排),문화(門畫)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집필자 | 한만영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설날에 새해를 송축하고 재앙을 막기 위해 대문 또는 벽에 붙인 그림.
[개설]
세화(歲華) 는 새해 첫날의 세시 풍속 중 하나로 문짝에 주로 붙이기 때문에 문배(門排) 또는 문화(門畫)라고도 하였다. 질병이나 재난 등의 불행을 사전에 예방하고 한 해 동안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기복적(祈福的)인 성격을 가진 풍속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설날 새해를 송축(頌祝)하기 위해 호랑이나 닭의 그림을 그려 서로 주고받았으며, 이를 대문 또는 벽에 붙여 액막이를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세화 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세화가 문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모시는 문신(門神) 풍습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면, 신라 시대 이래로 역귀(疫鬼)를 쫓는 벽사신(辟邪神)인 처용(處容)의 얼굴 그림을 문에 붙이던 풍습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화는 주로 고려 말 조선 초기 무렵부터 풍습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에는 궁중 풍속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점차 민간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세화 에 대하여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민속 해설서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도화서(圖畵署)[조선 시대에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수성(壽星)[천구(天球)의 남극 부근에 있어 2월 무렵에 남쪽 지평선 가까이에 잠시 보이는 별로 중국의 고대 천문학에서는 사람의 수명을 맡아보는 별이라 하여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믿었다.], 선녀(仙女)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의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하는 것을 이름하여 세화라 한다. 그것으로 송축하는 뜻을 나타낸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 영조·정조 때 유득공(柳得恭)이 한양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책인 『경도잡지(京都雜誌)』나 순조 때 김매순(金邁淳)이 펴낸 조선 시대의 세시 풍속에 관한 책인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이 있다.
[절차]
『동국세시기』 등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궁중에서 사용하는 세화는 도화서에서 제작하여 진상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등급으로 나누어 각 전(殿)과 종실, 재상 및 신하들에게 내렸으며, 기복적인 의미로 장수를 상징하는 수성(壽星)과 선녀 그림을 비롯하여 길상적(吉祥的)인 성격을 지닌 인물, 화훼, 누각 등을 그렸다. 민간에서는 설날에 동물 중에서 벽사의 힘을 많이 지닌 것으로 믿었던 닭과 호랑이를 주로 그려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세화는 민화의 범주로 분류되고 있으며, 해마다 새로운 것으로 갈아 붙였기 때문에 남아있는 유물이 드물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민간 신앙 중에는 가신 숭배(家神崇拜)의 전통이 있으며, 이 중에는 문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문신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다. 문신을 모시는 방법으로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탱자나무를 문 위에 걸어놓거나,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문에 써 붙이는 방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세화 는 궁중을 중심으로 사대부의 집에서 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일부 문신의 풍습과 결합하면서 민간에서도 세화를 모사(模寫)한 그림을 붙이는 풍습이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농촌보다는 정교한 대문을 가진 서울 등의 도시 주택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주민 김무웅[남, 72세]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 세화 풍속은 보거나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예로부터 부유층이 모여 살던 지역 이외에는 세화 풍속을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