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543 |
---|---|
한자 | 三一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계형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전개된 3·1 독립 만세 운동.
[개설]
경기도 포천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13일 오전 11시 포천 공립 보통 학교의 정수환(鄭壽煥)을 비롯한 3·4학년 학생들이 일본인 교원의 눈을 피해 학교 뒷산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비롯되었다. 같은 시각 영중면(永中面)에 위치한 영평 공립 보통 학교에서도 시위운동이 기도되었고, 이후 3·1 운동은 경기도 포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첫 대중적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24일 영중면 영평리와 소흘면 송우리에서 일어났다. 영평리에서는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했으며, 군청 사무소를 습격하여 친일 면장을 응징하고 영평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였다. 송우리에서는 주민 600여 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나 송우리 헌병 분견소 헌병 경찰들의 총검에 의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29일에는 소흘면 무봉리와 군내면 유교리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30일에는 3·1 운동 기간 동안 경기도 포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신북면·일동면·이동면·영중면 주민 2,000여 명이 신북면사무소 앞에 모여 집회를 갖고 대대적인 연합 시위를 벌이면서 일본 헌병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헌병 경찰의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이영여(李榮汝)·최석휴(崔錫休)·성성문·이치상(李致相)·서성달(徐成達) 등이 순국하고, 고진환(高鎭煥)·유중식(兪中植)·함병현(咸炳鉉)·이이만(李二萬)·조계식(趙啓植)·조훈식(趙薰植)·최학돌(崔學乭)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4월 1일에는 일동면·기산면 주민 2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3일에는 일동면 장암리 주민 500여 명과 노곡리 주민 400여 명이 각각 시위를 전개했으며, 신북면 삼정리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4월 4일에는 영북면 자일리에서도 안응건(安應乾)이 만세 시위운동을 기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