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31 |
---|---|
한자 | 烈女 |
이칭/별칭 | 열부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지혜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위하여 지극한 정성을 다한 부녀자.
[개설]
일반적으로 열녀는 남편에 대해 정절을 지킨 여성을 말한다. 남편이 죽은 뒤 수절을 한다거나, 따라 죽는다거나, 외간 남자의 정조 유린 위협에 죽음을 무릅쓰고 대항해 정절을 지킨 여성들이다.
조선은 유교적 위계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로 모든 사회 질서가 남성 중심으로 흐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조선 시대 여성들은 순종적이며 정절을 목숨처럼 여기고, 근면검소하는 유교적 덕목을 갖춘 이상적인 여성상이란 틀 속에서 갇혀 살아야 하였으며, 각종 교화정책과 정표정책을 통해 정절 관념이 사회 전반으로 광범위하게 정착되었다.
[제주의 열녀 모습]
조선 시대의 제주 지역 열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與地圖書)』·『제주읍지(濟州邑誌)』·『탐라지(耽羅志)』·『효열록(孝烈錄)』·『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 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열녀는 조선 사회의 보편적인 관념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별로 구체적인 열행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내면의 관념에는 어느 지역에서나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가치관이 형성되어졌다. 제주는 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 또한 토착된 민간신앙 때문에 유독 유교가 뿌리를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사들과 유배 온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교화활동에 힘입어 지방 유림들은 점차 자신들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유배를 온 유학자들은 제주에 머물면서 제주 사람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고, 유배지인 제주에서의 왕성한 집필 활동 역시 제주에 유교가 널리 퍼지는 데 기여를 하였다.
옛 문헌에 기록된 127명의 제주 열녀를 토대로 삼읍별 분포를 보면, 제주목이 36%, 대정현 8%, 정의현 14% 등으로 나타난다. 세 지역이 수치상 차이가 나는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우선 제주목이 정의현과 대정현을 포함한 제주 지역을 총괄하였고, 인구나 규모면에서도 정의현과 대정현에 비해 가장 컸다. 그리고 기록에 남은 열녀를 토대로 정확히 시기가 드러나는 열녀는 분석해 보면 제주목은 16세기부터, 정의현은 18세기부터 열녀가 나타난다.
육지부에 비해서 시기적으로는 많이 늦지만 제주 역시 조선 사회 전체가 그러하듯, 유교적 교화를 통해 정절 관념이 정착화 되어가고 19세기에 이르러 열녀로 정표되는 자가 급증한다. 정표자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귀천의 구별 없이 포상되었다. 조선 시대의 ‘열(烈)’은 마음가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행(行)’이 함께 뒤따랐고, 이 ‘행’은 여성의 몸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조선 시대 제주 지역 열녀들을 열행을 보면 수절이 약 70%, 자결이 약 30%로 나타난다. 수절과 자결이라는 분류는 결과론적인 입장이고, 대부분의 열행들은 여러 가지 행위가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사례가 많다.
그리고 제주는 섬이라는 특성상 육지부에서 흔히 나타나는 열행이 전혀 나타나지 않거나, 바다와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남편의 표류로 인해 열녀로 정표되는 사례에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 제주 지역 열녀는 수적으로 육지부와는 많은 차이가 있고, 열행 사례도 다양한 편은 아니다. 그리고 육지부에서 흔히 나타나는 남편의 복수와 관련된 열녀, 남편의 병을 위해 할고(割股)를 행하는 열녀 등의 사례가 제주 지역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열녀로 정표가 되면, 정려를 받은 가문은 세금 감면과 자손의 관리 특채, 부역면제 등의 혜택이 주어졌다. 즉 개인의 영광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정신적·물질적 이익까지 가져다준다. 그래서 양반에게는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수단이 되고, 양인에게는 과중한 역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며, 천민에게는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를 의미하므로, 열녀는 한 여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족이 살아가는 방편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오면 열녀로 정표를 받는 것이 개인과 가족의 큰 목표가 되었고 이것이 극단적인 열녀 형태를 가져온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가문에 영광을 안겨 줄 절호의 기회가 바로 죽임이었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 온 신분인 하층민일 경우, 온 사회가 찬사를 보내는 이 같은 죽음으로 신분 상승의 쾌감을 한순간 느끼며 죽어 갈 수가 있었다.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온 제주 열녀들을 통해 척박한 제주 땅에서의 그들의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다.
[서귀포 지역의 열녀]
기록상 출신 지역을 파악할 수 있는 열녀 가운에 현재의 서귀포 지역에 해당하는 열녀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양원방의 처 강씨는 대정현[현 신창리] 사람으로 남편과 사별 후 시모 병 간호 및 가족을 부양하였다. 정의현[현 수산리] 사람 강씨, 정의현[현 수산리] 사람 고영도의 처 강조이, 정의현[현 수산리] 사람 한광혁의 모 강조이는 사별 후 시부모를 봉양하며 평생 수절하였다. 오경인의 처 고씨는 정의현[현 수산리] 사람으로 사별 후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가선대부호조참판 조명윤의 처 김씨는 정의현[현 성읍리] 사람으로 상분[변]으로 남편의 병세를 가늠하면 돌보고, 사별 후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평생 수절하였다. 김광빈의 처 김씨는 정의현[현 위미리] 사람으로 남편 사망 후 목매어 자결하였다. 유생 강응주의 처 김씨는 대정현[현 창천리] 사람으로 남편과 사별한 후 시모가 죽자 자결하였다. 유생 김창은의 처 김씨는 대정현[현 중문동] 사람으로 사별 후 목매어 자결하였다. 유학 김정욱의 처 김씨는 정의현[현 위미리] 사람으로 남편 기일에 자결하였다. 군교 부가의 처는 정의현[현 의귀리] 사람으로 다른 남자가 만졌던 자신의 손을 잘랐다. 유생 오극지의 처 부씨는 정의현[현 고성리] 사람으로 남편의 상을 지낸 후 자결하였다. 강시한의 처이자 정의향교의 계집종인 송천향은 정의현[현 성읍리] 사람으로 사별 후 어린 자식과 가문 유지 목적으로 평생 수절하였다. 임도관의 처 양씨는 대정현[현 중문동] 사람으로 아픈 남편을 위해 단지[손가락 자름] 수혈을 하고, 사망 후 자결하였다. 김창언의 처 오씨는 정의현[현 의귀리] 사람으로 아들을 출산한 지 한 달 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뒤따라 투신, 자살하였다. 박성림의 처 오씨는 대정현[현 화순리] 사람으로 사별 후 절식하며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평생 수절하였다. 김천종의 처 오조이는 정의현 사람으로 사별 후 자결하였다. 처사 강응록의 처 이씨는 대정현[현 하례리] 사람으로 삽려 후 절식으로 자결하였다. 직원 석방리 보개의 처 정씨는 정의현[현 한남리] 사람으로 사별 후 주변 유혹과 재가 권유를 물리쳤다. 변종원의 처 현정매는 정의현[현 법환동] 사람으로 사별 후 한 달간 식음 전폐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현도견의 처 홍조이는 정의현[현 오조리] 사람으로 사별 후 평생 수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