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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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寒岡鄭逑-檜淵書院 |
영어공식명칭 | Hangang Jeong Gu and Hoeyeon Seowon |
분야 | 종교/유교,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수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43년 7월 9일 - 한강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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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83년 - 회연초당 완공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4년 - 오창정 한강(寒岡) 북쪽에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4년 - 천상정 한강(寒岡) 서쪽에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4년 - 무흘정사 완공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5년 - 회연초당 부설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20년 1월 5일 - 한강 정구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27년 - 회연서원 완공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90년 - 회연서원 사액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4년 12월 10일 - 회연서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지정 |
관련 지역 | 회연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 |
[정의]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조선 시대 성리학자 한강 정구와 그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
[개설]
조선 선조 대 성리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제(高弟)[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로, 이후 퇴계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은 한강 정구가 제자를 기르기 위해 건립한 회연초당(檜淵草堂)에서 비롯하였는데, 정구는 강학과 독서를 하며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회연초당은 한강 정구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를 비롯해 그를 흠모한 많은 선비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서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의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바탕이 되었던 곳이며,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도 기여한 의미 깊은 장소이다.
[회연서원과 백매원]
성주군 수륜면에 있는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가 제자들에게 강학하고, 그의 제자들이 학문적 교류를 이루던 공간이었다. 봄날의 회연서원은 활짝 핀 매화로 유명세를 떨친다. 정구는 정원에 매화 100그루와 대나무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제회연초당(題檜淵草堂)」에서 백매원의 풍광과 정취를 노래하였다.
변변찮은 산 앞에 자그마한 초당이라[小小山前小小家]
동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난다[滿園梅菊逐年加]
게다가 구름 냇물 그림같이 꾸며 주니[更敎雲水粧如畫]
세상에서 내 생애 누구보다 호사스럽구나[擧世生涯我最奢]
한강 정구의 연보를 살펴보면, 49세 때인 1591년(선조 24) 봄에 성주(星州) 고을 회연(檜淵) 아래 약 3.93㎞[10리] 지점에 있는 사창(社倉)으로 주거지를 옮기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옥설(玉雪)과 같이 지극한 깨끗함을 표상하는 매화를 심어 학자의 고결한 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회연서원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진 정구의 학문과 정신을 백매원의 매화가 그 징표로 밝혀 주고 있다.
[한강 정구 사상의 특징]
한강 정구는 성주 출신으로 이 지역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정구의 할아버지 정응상(鄭應祥)은 김굉필(金宏弼)의 사위로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아버지 정사중(鄭思中)은 외가인 현풍에 거주하다가 성주 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과 혼인하며 성주 사월촌에 정착하였다. 가문의 배경은 정구의 학문적 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그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김굉필의 학문적 성향을 이어받게 되었다.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하여 『소학(小學)』 연구에 몰두하였다. 김종직은 『소학』에 입각하여 수기(修己)를 강조하였고, 성학(聖學)을 추구하였다.
아울러 정구는 1556년(명종 11)에 퇴계 이황의 문인인 황준량(黃俊良)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면서 남명의 문인 오건(吳健)과 함께 강학할 때 수학하였다. 이 두 사람은 후에 정구가 이황과 조식의 문하를 모두 출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정구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면서 남명 조식의 문인이기도 하였다. 이황과 조식은 영남 좌도와 영남 우도에서 각기 인재를 대상으로 학문을 이끌어 나갔다. 이들은 학문의 근본을 『중용(中庸)』의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에 두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경(敬)을 수양의 방법으로 중시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학문적 지향과 출처(出處)에 있어서는 다른 성향을 보였다.
정구는 당대 사림의 종장이었던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 모두 출입하면서 당시 사림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였으며, 특히 ‘심학(心學)’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심경부주(心經附註)』를 비판하면서 『심경발휘(心經發揮)』를 저술하였다. 정구는 예학(禮學)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여 주목할 만한 저술을 남겼다.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에서는 천자(天子)로부터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각종 경우에 따라 상복(喪服)을 입는 방법을 도표로 제시하고 설명을 붙여 놓았다.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는 주희(朱熹)의 『가례(家禮)』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관혼상제(冠婚喪祭) 및 잡례(雜禮)를 천자·제후(諸侯)·사(士)·대부(大夫)로 나누어 옛 예서(禮書)를 중심으로 항목을 설정해 원문을 싣고 있다. 그리고 정호(程顥)·정이(程頤)·사마광(司馬光)·장재(張載)·주희(朱熹) 등 다섯 선생의 예설을 해당 항목에 배열하였다. 이는 7책 20권의 방대한 분량의 예학 전문 저술이다.
정구는 심학과 예학에 정통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 및 천문·지리·산술(算術)·병진(兵陣)·의약(醫藥)·복서(卜筮)·서법(書法) 등에도 능하였고, 심지어 이단(異端)의 설에까지 널리 통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박문(博文)을 추구하는 학풍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구는 이러한 다양한 관심을 저술로 남겼는데, 그의 저술은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많았다. 그는 또한 읍지(邑誌) 편찬에도 노력을 기울였는데 상세한 항목으로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읍지 하나만 제대로 익힌다면 읍재(邑宰)로서 손색 없는 행정을 펼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담아 놓았다.
[회연서원의 연원과 건립]
회연서원의 ‘회연(檜淵)’에 대해서는 네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봉비암(鳳飛巖) 아래 소용돌이치는 깊은 소가 있어 회연(回淵)이라고 하였다가 회(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둘째, 공자(孔子)가 손수 심은 나무인 회나무에 근거하였다고 한다. 셋째, 회연서원 근처 가야산(伽倻山)에 잣나무가 많아서 이를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넷째, 전나무[檜]가 연못가에 있었기 때문에 회연이라 하였다고 한다.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회를 ‘젓나모 회’로 풀이하고 있다. 여러 의견 가운데 그 명칭 기반은 첫 번째와 네 번째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회연서원은 서원지(書院誌)가 현존하지 않아 그 역사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2014년 회연서원 강당 해체 보수 공사 당시 발굴된 들보의 기록 등을 포함한 다양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정구가 회연초당을 만들어 강학하던 16세기, 최항경(崔恒慶)과 배상룡(裵尙龍)을 중심으로 한 정구의 제자들이 회연서원을 창건하고, 문중 사람 정위(鄭煒)와 정동박 등이 중심이 되어 서원을 무흘구곡(無屹九曲)과 연계시켜 대대적인 사업을 벌인 17세기~18세기, 서원 철폐령으로 무흘정사(武屹精舍)와 회연서원이 함께 훼철되었던 암흑의 19세기~20세기 초반, 회연서원을 복원하여 지방문화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20세기라는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정구가 회연초당을 건립한 1583년(선조 16)에서 회연서원 건축을 위한 상량 직전인 1621년(광해군 13)까지이다. 회연초당은 1583년 정구의 나이 41세에 건축하였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소실되었고, 1605년(선조 38) 그의 나이 63세에 다시 재건하였다. 초당의 동쪽에 초가를 짓고 망운암(望雲庵)이라 하였는데, 당시 정구는 무흘정사와 회연초당을 오르내리며 강학과 독서를 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회연서원을 초창한 1622년(광해군 14)부터 시작된다. 정구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 회연서원 건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최항경과 배상룡 등이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1627년(인조 5)에 완공하였다. 1690년(숙종 16)에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이후 회연서원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 갔다.
세 번째 시기는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1868년(고종 5)부터 회연서원이 다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기 직전인 1973년까지이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회연서원도 수난의 시기를 겪게 되었으나 성주에서는 조정의 관리들이 머무는 지참관(支站館)의 명목으로 강당을 존속시켰고, 이때 회연서당(檜淵書堂)으로 불렸다. 8·15 광복 이후 회연서원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네 번째 시기는 1974년에 회연서원이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시작한다. 1975년 이후 회연서원 복원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하였고, 승모각에 보관 중이던 목판 1,381장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였다. 한강 정구 신도비(寒岡鄭逑神道碑)는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한강 정구의 문인과 유학적 위상]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고제였던 정구는 16세기 중후반부터 강학 활동을 통해 성주, 대구를 비롯한 영남 일원에서 342명의 문인을 규합하여 한강학파 형성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한강 문인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였지만 90%가 영남 출신이라는 점에서 지역성이 강하였다. 특히 전체 문인의 약 60%가 성주와 칠곡, 대구, 현풍, 고령, 창녕, 밀양 등 낙동강(洛東江) 중류 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정구의 문인록인 『회연급문록(檜淵及門錄)』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회연급문록』에 수록된 문인은 342명이고, 이 책 역시 여타의 문인록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증보 과정을 거쳐 1974년에 완정(完定)되었다. 『회연급문록』은 편찬 방식에 있어 주자의 『이학통록(理學通錄)』과 이황의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을 준용하였는데, 이는 주자→이황→정구로 이어지는 학통 인식과 관련이 깊었다.
한강 문인은 강좌, 강우 등 경상도 전역을 비롯하여 서울 및 경기·호서 지역에까지 두루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한강학파의 외연이 매우 광범위하였음을 뜻한다. 그러나 문인의 지역별 분포를 세밀히 살펴보면, 영남권 중에서도 낙동강 연안 지역 집중 현상이 뚜렷함을 알 수 있다. 즉, 342명 가운데 약 90%가 영남 출신이고, 약 62%가 낙동강 연안 지역[김천, 상주, 선산, 인동, 칠곡, 성주, 대구, 경산, 현풍, 고령, 영산, 창녕, 함안, 청도, 밀양, 김해]에 분포하고 있었다. 342명에 이르는 한강 문인의 규모는 조선 중후기 영남학파를 통틀어 장현광의 문인[355명] 다음으로 많은 수치이며, 17세기 후반부터 영남 사림을 대대적으로 규합하여 ‘갈암학파(葛庵學派)’를 형성한 이현일(李玄逸)의 문인 규모[341명]를 상회하였다. 한강 문인[342명]과 여헌 문인[355명]은 총 697명이며, 여기서 양문을 출입한 64명을 빼면 문인록을 통해 확인되는 한려학파의 총원은 633명이다. 바로 이들이 퇴계·남명 이래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 융합하면서 17세기 초반의 영남학계를 이끈 실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구는 개국공신의 후손이자 사림파에서 확고한 위상을 점하고 있던 김굉필의 외후손이라는 ‘문벌’과, 퇴계·남명 양문의 고제라는 ‘학벌’을 바탕으로 이황과 조식이 죽은 후 영남학계의 기대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성주 출신이었던 그는 한강정사와 회연초당, 무흘정사 등에서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고, 만년에는 칠곡의 노곡·사양정사를 기반으로 하여 문도를 대대적으로 규합할 수 있었다. 심학과 예학으로 널리 알려진 정구의 학문적 위치는 영남에서 이황 이후 제일인으로 평가 받아 왔다. 학문이 순정(純正)하고 조예(造詣)가 정심(精深)하며 논의가 정당하고 거취가 명백하다는 그에 대한 평은 영남학파 학인들의 공론이 되었으며, 기호학파 학인들도 인정하였다. 정구는 김굉필로부터 시작한 가학적 전승을 배경으로 16세기 중엽 이후 축적된 사림의 학문적 성과를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영남에서 적지 않은 추숭(追崇)을 받았고, 스스로의 자부심 또한 적지 않았다.
[회연서원 시간 여행]
회연서원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과거의 회연서원은 어떤 모습일까? 회연서원을 둘러싼 자연 풍경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는 옛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겸재(謙齋) 정선(鄭歚)의 「회연서원도(檜淵書院圖)」와 김상진(金相眞)의 「봉비암도(鳳飛巖圖)」가 그것이다.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인물로 금강산(金剛山)을 비롯하여 서울 근교와 영남의 산수도 다양하게 화폭에 담았다. 「회연서원도」는 18세기 전반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서원이 건립된 지 100년쯤 지난 무렵이다. 이 그림의 시점은 서원을 포함해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하늘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것 같은 시점인데, 그 당시 겸재의 공간감과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봉비암도」는 1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정선의 실경 산수화풍을 많이 닮았다. 「봉비암도」에서는 봉비암이나 서원의 위치, 물의 방향, 연감산과 그 자락의 마을 등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하지만 정선의 그림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 사이 서원 건물 등에 변화가 생기고 지형도 약간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세대를 거치며 변화를 거듭한 회연서원이지만, 한강 정구를 기리는 서원의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고, 봄이면 만개하는 백매원의 매화도 여전하다. 큰 도로가 놓이고, 예전과는 달라진 서원의 구조, 변해 버린 주변 풍광들. 모든 것이 변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연서원은 여전히 회연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