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2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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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斯文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주홍 |
성격 | 능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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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508년(중종 3년) 4월 |
관련인물 | 한사문 |
높이 | 1.5m |
지름 | 13.3m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1 |
소유자 | 청주한씨 문정공파 종회 |
[정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한사문의 묘.
[개설]
한사문(韓斯文)[1446~1507)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예(子藝)이다. 한계희(韓繼禧)의 장남이다. 1462년(세조 8년) 음보(蔭補)로 문소전직장(文昭殿直長)이 되고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1495년(연산군 1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아버지의 봉작을 물려받아 서천군(西川君)에 봉군되었다. 이듬해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이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고 1498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00년(연산군 6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재임 중 정조사(正朝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후 1504년(연산군 10년) 공조판서(工曺判書)로 승진하였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어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위치]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 있는 율동공원 내의 번지 점프장을 바라보는 나지막한 구릉상에 남향(南向)하여 있는 2기의 묘 중 아래의 묘이며, 한계희 묘 오른쪽 능선에 인접하여 있다.
[형태]
원형의 봉분은 하부에 백색 화강암으로 높이 78㎝의 둘레돌 18매를 둘렀고, 각 면에는 무궁화, 새, 난초 등을 양각하였다. 봉분의 높이는 1.5m이며, 둘레는 13.3m이다. 묘역에는 혼유석·상돌·4각 향로석·계체석·문인석·신도비 등의 석물이 있으나, 옛 석물은 문인석과 신도비뿐이다. 이 중 문인석은 복두(幞頭)로 좌측이 높이 188㎝에 얼굴 부분 62㎝이다. 얼굴은 갸름한데 큰 눈에 직삼각형의 코가 특이하며 홀(笏)을 마주잡은 두 손은 손가락의 표현이 없다. 관복의 옷소매는 길게 발목까지 늘어뜨렸으며. 신체의 표현이 홀쭉하다. 우측은 높이 184㎝에 얼굴 부분 60㎝의 같은 형태로 코가 마모되어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도비는 봉분 하단에 위치하여 서향(西向)하고 있다. 백색 화강암의 비좌와 일석인 백색 대리석의 비신 및 상부 연봉 장식을 갖춘 고깔형의 고려식 형태이다.
[금석문]
신도비 비신의 비문은 전후 2면에 있으며 비제는 분의정국공신정헌대부서천군익공간한공신도비명 병서(奮義情國功臣正憲大夫西川君謚恭簡韓公神道碑銘 幷序)이다. 비문은 신용개(申用慨)[1463~1519]가 찬하하였으며, 신흠(申欽)[1566~1628]이 서와 전을 하였다. 건립연도는 1508년(중종 3년) 4월이다.
[현황]
현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주한씨 문정공파 종회에서 관리하고 있고, 대부분의 비문은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었고 흑적색으로 변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