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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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石器時代 |
영어공식명칭 | Neolithic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이헌재 |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서 간석기를 사용하였던 기원전 5000년대 전반부터 기원전 1500년 무렵까지의 시기.
[개설]
한반도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유적에서 토기가 출토된 이래로 청동기시대가 개시되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4세기까지로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 홍적세가 끝나고 신생대 4기 충적세 후빙기가 펼쳐져 기후가 온난해진 시기이다. 기원전 5800년부터 기원전 3000년쯤까지는 애틀랜틱기(Atlantic time)로 지금보다 평균 기온이 높은 따뜻할 때여서 상록수와 활엽수, 낙엽활엽수가 널리 분포되어 현재와 같은 환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반도 서해안은 해수면이 현재보다 7m쯤 낮아 신석기 사람들은 현재의 해안선보다 더 바다 쪽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신석기시대는 기후의 급격한 온난화에 의한 동식물 등 생태계 변화에 인간 사회가 적응해 가는 과정이었다. 경기도 시흥 지역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자연 환경 덕분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게 발견되어 당시의 사회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지역이다.
시흥 지역의 신석기 유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시흥 오이도 유적의 오이도 조개더미[패총(貝塚)] 유적이다. 오이도 뒷살막 조개더미 유적에서는 화덕자리[노지(爐址)] 7기, 화덕 시설을 갖춘 수혈식(竪穴式)[구덩식] 주거지, 수혈[움]이 확인되었고 빗살무늬토기, 갈돌, 갈판, 홈돌 등이 출토되었다. 오이도 신포동 조개더미 유적에서는 물고기의 뼈와 같은 무늬가 새겨진 세로생선뼈무늬[횡주어골문(縱走魚骨文)] 계통의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돌화살촉, 간돌도끼[마제석부(磨製石斧)], 굴따는 석기, 중앙에 홈이 깊게 패인 모양의 역자식(逆刺式) 뼈화살촉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생활 용구들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복원하는 데 기초 자료를 제공해 준다.
[식량 자원과 빗살무늬토기]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형성된 낙엽활엽수를 위주로 하는 풍부한 삼림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에게 도토리 등 중요한 식량 자원을 제공하였다. 도토리는 신석기시대에 가장 많이 이용된 식물성 식량 자원이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유물 중 갈돌과 갈판은 도토리 같은 식물성 식량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는 데 이용되었다. 신석기시대에 식물성 자원의 이용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도구가 토기의 발명이다. 토기를 제작하여 도토리 같은 다양한 식물질 식료 자원을 보관하거나 조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음식을 익혀 먹는 것은 살균과 영양 흡수가 잘 되도록 도와주어 인류의 건강 유지 및 두되 발달에도 도움이 되었다.
신석기시대에는 조·피 등 잡곡을 재배하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식량 채집 단계에서 식량 생산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회 변화를 가리켜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른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면서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던 생활에서 움집을 지어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새로운 용기로서 토기는 식량의 저장 기능과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빗살무늬토기 문화 전기 무렵에는 서해안 지방의 신석기 유적이 많아진다. 서해안 지방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토기들은 뾰족한 밑 모양을 한 반쪽 달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입술·몸체·밑의 세 부위로 나뉘는데, 시기에 따라 무늬를 새기는 범위와 무늬 형태에 변화가 나타난다. 즉, 빗살무늬토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늬를 새기는 면적이 줄어들어 밑에서부터 생략되어 나가며, 부위별로 독특하게 새겨지던 무늬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규율이 흐트러져 가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빗살무늬토기의 생김새 변천 과정을 통해 시기 구분을 할 수 있어 시기 구분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시흥 오이도 유적의 가운데살막 조개더미 유적은 오이도의 서남쪽 구릉 사면에 있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토기는 기존의 서해 도서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와는 달리 오히려 한강 유역의 빗살무늬토기와 가까워 서해 도서 신석기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시흥 지역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밑이 둥근 바리가 기본적인 형태이다. 시흥 흘곳 조개더미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모양은 첨두형(尖頭形)이며, 문양은 세로생선뼈무늬가 새겨져 있고, 빗금무늬인 짧은빗금무늬[단사선문(短斜線文)]·정렬된 무늬[격자문(格子紋)] 등이 관찰되었다.
능곡동 선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아가리[구연(口緣)] 부분에 짧은빗금무늬, 점을 일렬로 늘어놓은 무늬인 점열문(點列文), 손톱무늬인 조문(爪紋)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동체부(胴體部)에는 세로생선뼈무늬나 여러 선으로 채워진 집선문(集線文), 물결무늬 모양의 파상문(波狀文) 등이 새겨져 있다. 토기 모양은 중서부 지역 빗살무늬토기의 전형적인 양상인 밑이 뾰족한 첨저형(尖底形)에 직립 구연부(口緣部)를 가진 토기와 일부 밑이 편평한 모양의 평저형(平底形) 토기도 확인되고 있다.
서해안 지방에서 신석기시대 후기의 토기는 소야도, 덕적도 등 서해 도서 전역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음을 보여준다. 토기는 무늬를 새기는 면적이 크게 줄어들어 주로 입술 부분에만 무늬가 새겨지며, 이것도 매우 퇴화된 양식으로 되어 무늬가 거칠고 엉성하다. 또 1~2줄의 빗금무늬가 나타나는 경우는 생선뼈무늬[어골문(魚骨文)]가 해체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시흥 지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토기는 다른 지역의 토기와 마찬가지로 모두 민무늬의 경향을 띠고 있다.
[서해안 지역 신석기 사람들의 생업]
구석기시대의 주요 사냥 대상은 매머드나 털코뿔이, 물소와 같은 거대 포유동물이었다. 반면에 구석기시대 후기에서 신석기시대로 들어오면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거대한 동물들은 사라지고 멧돼지나 사슴, 토끼와 같은 몸집이 작고 빠른 동물이 많아졌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활을 발명하여 동물 사냥에 이용하였다. 사냥 도구인 화살촉은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공통으로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도 물고기와 조개, 해초류 등 다양한 해양 생물이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시흥 지역은 갯벌이 널리 분포하고 있어 물고기잡이로 생활하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에게 최적의 거주 조건이었다. 따라서 시흥 지역의 해안을 따라 당시에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던 오늘날 섬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생활 유적인 조개더미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오이도에는 2018년 현재 12개소의 조개더미 유적이 있는데, 거의 섬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시흥 오이도 유적은 오이도 안말 조개더미 유적 옆에 길게 형성된 마을로 빗살무늬토기와 그물추[어망추(漁網錘)], 흑요석(黑曜石)이 발견되었다. 서해안 지방에서는 물고기잡이 도구로 낚시 바늘과 함께 납작한 자갈돌의 양면이나 네 면을 쪼아 만드는 그물추가 출토된다. 돌도끼는 날 부분만 간 사릉부(四稜斧)가 위주이나 단면이 렌즈 모양인 대팻날도끼[편평석부(扁平石斧)]도 있다. 그리고 대팻날과 끌, 자귀, 창끝, 망치, 크고 작은 숫돌, 그리고 톱처럼 돌을 자를 때 사용한 찰절구(擦切具), 닦음돌과 발화석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된다. 집터 유적에서는 석재를 같은 크기로 잘라놓은 반제품도 나온다.
신석기시대 중기 무렵에는 서해안 지방의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전국으로 보급·확산되는 가운데 농경도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경기도 일산 지역의 신석기시대 토탄층(土炭層)에서는 대형의 벼꽃 가루가 나와 이 무렵 벼농사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시흥 지역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농경 기술도 알고 있었다. 망치돌, 갈판과 갈돌, 굴지구(堀地具)[돌괭이와 돌삽, 돌보습과 같이 땅을 일구거나 파는 데 사용한 석기를 통칭] 등의 석기는 신석기시대 집터 유적에서 일반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농경 관련 유물은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빗살무늬토기, 말안장 모양의 갈돌과 갈판, 돌보습 등의 도구들이 초기 농경과 관련하여 시흥 지역을 포함한 우리나라 중·서부 지역으로부터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말까지도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서 생활하고 조개더미 유적 등을 남긴 것으로 보아 농경의 비중이 물고기잡이나 사냥, 채집을 대체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나 뼈바늘[골침(骨針)]과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옷이나 그물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능곡동 선사 유적에서 나타난 서해안 지역의 취락]
신석기시대에는 생업과 경제상의 변화로 움집을 짓고 정착 생활을 하였다. 움집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 생활을 영위하였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능곡동 선사 유적에서 발굴된 집터의 형태는 집터 한 변의 길이가 300~450㎝ 내외의 방형(方形)이다. 집터의 내부 시설로는 화덕자리와 기둥구멍, 저장용 구덩이 등이 있다. 화덕자리는 집터 중앙에 1기씩 있고, 기둥구멍의 배치 형태는 4주·6주·8주씩 확인되었다.
서해안 지역의 삼목도, 시흥시 능곡동 선사 유적에서 본격적인 구덩 주거지가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 나타난다. 형태는 방형 또는 원형에서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으로 변화한다. 시흥시를 포함한 서해안 지역의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은 신석기시대 중기보다 후기에 더 작아지고 입지도 강변 충적지에서 구릉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