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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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陵谷洞先史遺蹟 |
영어공식명칭 | Prehistoric Site in Neunggok-d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물 산포지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 |
집필자 | 이헌재 |
[정의]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산15 일대에서 발견된 역사 기록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의 유적.
[개설]
시흥 능곡동 유적은 2005년과 2006년 능곡 택지지구 개발 사업으로 인하여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에서는 전체 5개 지점에서 신석기시대 주거지,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구덩[수혈(竪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때의 돌방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이 중 방사선 탄소 연대는 신석기시대 유적의 경우 기원전 3700~3200년으로 편년되었고, 청동기시대 유적의 경우 기원전 1320~1270년으로 편년되었다. 따라서 능곡동 선사 유적은 시흥 지역의 선사시대 사회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위치]
시흥 능곡지구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산15 일대와 군자동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높이 100m 내의 낮고 평평한 구릉이 연속되고 있어 선사시대 이래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형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유적이 입지한 구릉에서 해안선까지의 직선 거리는 3㎞ 정도이나, 간척 사업 이전에는 인접한 곳까지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100m 내의 낮고 평평한 구릉이 연속되어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한국토지공사가 정부의 서민 주거 안정 대책에 따른 국민 임대주택 건설 정책의 추진과 수도권 지역의 안정적인 주택 건설 용지 확보를 위해 시흥 능곡지구 택지 개발 사업이 계획되면서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유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지,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구덩,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때의 돌방무덤, 조선시대 주거지, 묘, 구들, 기와 가마, 석렬(石列) 등 155기의 다양한 유구(遺構)를 확인하였다.
[형태]
발굴 조사 1지점에 해당하는 높이 30m 내외의 구릉 경사면에서 신석기시대의 주거지 24기가 밀집하여 있는 양상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마을이 확인된 1지점은 조사 지역 최북단에 있으며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높이 33m 구릉의 능선 정상부와 남쪽의 완만한 경사면 상단부에 동서로 길게 조성되었다.
전체적인 배치 양상은 구릉 정상부의 평탄면을 따라 동서로 길게 1열이, 인접한 하단의 완만한 남사면에 1열이 위치하였다. 평면 형태는 모두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2.6~5m 내외이다. 4.5~5m인 큰 주거지들은 7~15m의 간격을 두고 정상부에 분포하는 데 비해, 4m 미만인 것들은 남사면과 정상부 동쪽에 3~6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분포하였다. 이 중 3m 내외인 가장 작은 것에 속하는 3기는 동쪽의 경사면에 분포하는 양상이다.
주거지의 내부 시설은 중앙에 구덩형 화덕 자리[노지(爐址)] 1기가 있으며 기둥 구멍은 주로 네 모서리에 분포하였다. 각 모서리마다 지름 0.2m 내외, 깊이 0.3~0.5m의 비교적 깊은 기둥 구멍이 하나씩 있으며 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양상이다. 이 밖에 도랑과 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는 중앙에 있고 평면 형태는 원형, 타원형, 방형(方形)의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저장 구덩이는 6호 주거지 북서 모서리 부근에서 소형의 첨저 심발형 토기(尖底深鉢形土器)가 4/5가량 묻힌 채로 확인되었다. 저장 구덩이의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땅을 판 후 토기 조각과 점토를 채워 넣고 그 위에 토기를 고정시켰다.
[출토 유물]
능곡동 선사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첨저 심발형 토기와 말각평저 발형 토기(抹角平底鉢形土器)의 두 종류로 대별된다. 토기는 대부분 장석·운모·석영과 세석립(細石粒)이 혼입된 점사질토(粘砂質土)이다. 무늬는 다른 토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열 타래문(點列絡繩文)[소용돌이무늬)·점열 중호문(點列重弧紋)[무지개무늬]이 시문되었다. 이러한 활석계 토기는 무늬 형태와 정면 기법이 일반적인 토기와는 다른 특수 토기이거나 외부로부터 유입된 토기로 판단된다.
토기는 무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나, 무늬가 없는 것은 수량이 매우 적고 태토(胎土)[바탕흙]나 기형(器形), 크기 면에서 다른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다. 아가리[구연부(口緣部)] 부분 무늬는 짧은 빗금무늬[단사선문(短斜線文)], 작은 점 무늬[점열문(點列文)], 하나의 선 무늬[단선문(單線紋)], 빗살무늬[조문(爪紋)], 세로 방향 사선무늬[사선대문(斜線帶文)], 사격자문(斜格子文)이 확인된다. 몸통[동체부(胴體部)] 부분 무늬는 가로생선뼈무늬[횡주어골문(單齒橫走魚骨文)], 세로생선뼈무늬[종주어골문(縱走魚骨文)],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 점열 타래문, 점열 중호문, 세로 방향 사선무늬, 사격자문이 있다. 이 중 아가리 부분의 짧은 빗금무늬와 몸통 부분의 가로생선뼈무늬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능곡동 선사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무늬를 새길 때에 가로 방향으로 전면을 쉼 없이 일주(一週)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여백의 모양을 계획하고 일정한 단위 폭만큼씩만 돌려가면서 새겨 전체적인 무늬를 구성하였다.
시흥 능곡동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모두 63점으로 공이[고석(敲石)], 갈돌[연석봉(硏石棒)], 갈판[연석(硏石)], 돌도끼[석부(石斧)], 숫돌[지석(砥石)], 받침돌[대석(臺石)], 돌칼[석도(石刀)], 돌화살촉[석촉(石鏃)] 등이다. 이 중 공이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갈판은 12호와 13호 주거지에서 각각 1점씩 모두 2점이 출토된 데 반해, 갈돌은 15점으로 갈판에 비해 다량 출토되었다. 대부분이 간석기이며 일부 뗀석기도 확인된다. 재료는 석영, 화강암, 운모편암, 편마암, 응회암, 섬록암, 규암, 슬레이트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주변에 흔히 구할 수 있는 석영은 공이를 만드는 데 주로 쓰였으며, 화강암·운모편암·편마암은 갈돌·갈판·숫돌, 규질편마암은 돌도끼, 슬레이트는 돌화살촉을 만드는데 쓰였다. 용도별 구성은 갈돌·갈판의 식료 가공용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바닷가와 인접해 있지만 어로 도구는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은 경기도 서해안 지역에서 최근 조사된 인천광역시 삼목도Ⅲ 유적과 경기도 안산시 신길동 유적과 매우 유사하다.
토기와 석기 이외에도 도토리, 조, 기장 등의 다양한 식물 유체(遺體)가 확인되었다. 부산광역시 동삼동 조개더미와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댐 수몰지구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유적에서 나온 조와 기장으로 보아 작물 경작이 채집 경제와 함께 생업 경제의 일부였음을 보여 준다. 그동안 신석기시대 갈돌과 갈판 세트는 주로 유적에서 출토된 도토리 등의 견과류를 갈기 위한 도구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13호 주거지에서 발견된 갈판의 전분[녹말] 분석을 통한 조속(-屬) 종자의 검출은 견과류뿐만 아니라 곡물을 가는 데도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현황]
시흥 능곡동 유적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24기,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7기, 구덩 2기,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때 돌방무덤 6기, 고려시대 가마 1기, 조선시대 이후의 묘 87기, 석렬, 구들, 소성 유구(燒成遺構), 적석 유구(積石遺構), 기와 가마, 화덕 자리, 석축(石築) 등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구의 조사 과정에서 신석기시대 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 공이, 갈돌, 갈판,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구순각목문 공렬 토기(口脣刻目文孔列土器), 원무늬가 시문된 토기[공렬 토기(孔列土器)], 붉은간토기[적색 마연 토기(赤色磨硏土器)], 찰절 석기(擦切石器)[석재의 양쪽 면을 길게 갈아서 끊어내는 방법으로 만든 도구], 돌로 만든 끌[석착(石鑿)]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유물로는 곧은입짧은목항아리[직구 단경호(直口短頸壺)], 심발형 토기(深鉢形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구와 유물은 시흥의 선사시대와 역사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의의와 평가]
시흥 능곡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의 출토이다. 빗살무늬의 양상은 중서부 지역 상대 편년(相對編年)에서 가장 이른 단계인 삼부위[아가리, 몸통, 바닥] 구분 시문보다 후행하는 중기의 무늬 요소이다. 중기에 들어서면 구분문계 토기는 저부(底部)[바닥] 무늬의 생략화 과정이 일어난다. 동일문계 토기와 아가리 한정 짧은 빗금무늬 토기는 이 시기에 출현한다. 신석기시대는 방사성 탄소 연대가 기원전 3730~3200년 사이에 속하며 기원전 3600년 정도가 유적의 중심 연대이다. 능곡동 선사 유적은 유물과 절대연대(絶對年代) 등으로 보아 중서부 지역 신석기시대 중기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능곡동 선사 유적과 유물은 주거지 내에서 출토된 공반(共伴) 관계가 확실한 토기의 무늬를 중심으로 중서부 지역 중기 편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전기와 중기가 혼재된 서울특별시 암사동 유적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전기에서 중기로 이행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단일 유적으로서 주변의 경기도 안산시 신길동 선사 유적, 경기도 용인시 농서리 유적, 인천광역시 삼목도Ⅲ 유적과 함께 중서부 지역 신석기시대 중기의 마을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