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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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영어공식명칭 | Prehistoric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선사 |
집필자 | 이헌재 |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서 문자로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기 이전의 유적과 유물.
[개설]
2000년대를 기준으로 시흥 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은 7개, 조개더미[패총(貝塚)]는 4개, 선사시대 분묘(墳墓)는 13개, 선사시대 유물 산포지는 17개가 지표 조사되었다. 시흥시의 선사 유적은 향후 정밀 발굴 조사나 지표 조사를 통해 더 늘어날 것이다.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계수동 구석기 유적, 목감동 구석기 유적이 있으며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시흥 오이도 유적의 오이도 안말 조개더미, 가운데살막 조개더미, 신포동 조개더미, 소래벌 조개더미가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계수동 고인돌, 군자동 고인돌, 금이동 고인돌, 조남리 지석묘 등을 들 수 있다. 시흥시 지역에 분포한 유적들은 선사시대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약 1만 년 전 무렵까지 약 400만 년 이상 지속된 시기이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동굴에서 살거나 평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도구로는 주로 돌로 만든 사냥 도구인 찍개, 주먹도끼, 찌르개와 요리 도구인 긁개, 밀개가 있으며 공구인 새기개 등과 동물의 뼈로 만든 도구[골각기(骨角器)]가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나무의 열매를 채집해 먹거나 동물을 사냥해 먹었다.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는 빙하기를 거치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큰 동물은 사라지고 토끼, 여우, 새 등 작고 날랜 짐승들이 출현하였다. 구석기시대 후기 사람들은 이 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해 작은 잔석기[세석기(細石器]를 만들어 나무나 뼈에 꽂아 활, 창, 작살 등의 이음 도구를 만들었다. 특히 나무 자루에 연결한 슴베찌르개는 창의 기능을 하였다.
구석기시대는 추운 빙하기와 따뜻한 간빙기가 여러 차례 번갈아 나타났다. 빙하기에는 북반구 일부가 빙하로 덥혀 있었기 때문에 해수면이 현재보다 120~130m가량 낮았다. 따라서 당시 시흥 지역과 인접해 있는 황해는 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거대한 분지 형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 기온이 올라가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황해가 생겨났다. 구석기시대 한반도와 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극심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넓은 지역을 이동하며 생활하였다.
시흥시 계수동 일대와 도창동, 매화동 일대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인 석영 맥암(石英脈巖) 또는 규암(硅巖)으로 만든 여러면석기, 찍개 등이 채집되었다. 계수동 구석기 유적은 소래저수지 쪽에서 삼십고개 넘어 도당골 골짜기 끝에 있는 성바오로 피정의 집 주위의 농장 밭에 있다. 도창동 구석기 유적은 도창저수지의 서쪽 편에 있는 강창마을의 입구 쪽에 있다. 언덕배기의 낮은 사면 주변에서 제4기층으로 보이는 붉은 점토층에서 석기가 수습되었다. 매화동 구석기 유적은 도창동에서 매화동으로 진행하면 장낙골을 지나 300여m 더 가면 길 우측 편으로 나지막한 구릉에 넓게 조성된 과수원에 있는데, 이곳에서 석기 한 점이 채집되었다. 목감동 구석기 유적은 목감사거리 북쪽 500m 정도 되는 지점에 있다. 독립된 구릉 하단의 완경사면에 제4기층으로 보이는 적갈색토가 폭넓게 분포하며 석영질의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일대의 포도 과수원에서 여러면석기 1점이 수습되었다. 월곶동 구석기 유물 산포지는 고잔마을 뒤 구릉인 월곶동 산117에서 구석기시대의 석기가 수습된 곳이다. 이를 통해 시흥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 홍적세(洪積世)가 끝나고 신생대 4기 충적세(沖積世) 후빙기가 펼쳐져 기후가 온난해진 시기이다. 기원전 5800년부터 기원전 3000년쯤까지는 애틀랜틱기(Atlantic time)로 지금보다 평균기온이 높은 따뜻할 때여서 상록수와 활엽수, 낙엽활엽수가 널리 분포되어 현재와 같은 환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반도 서해안은 해수면이 현재보다 7m쯤 낮아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현재의 해안선보다 더 바다 쪽에서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흥 지역은 갯벌이 널리 분포하고 있어 물고기잡이로 생활하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에게 최적의 거주 조건이었다. 따라서 시흥 지역의 해안을 따라 당시에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던 오늘날 섬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생활 유적인 조개더미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오이도에는 2018년 현재 12개소의 조개더미 유적이 있는데, 거의 섬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시흥 오이도 유적은 시흥시 정왕동의 오이도에 분포하고 있으며, 서해안에서 규모가 가장 큰 조개더미 유적이다. 안말 조개더미, 가운데살막 조개더미, 뒷살막 조개더미, 소래벌 조개더미, 작은소래벌 조개더미, 신포동 조개더미 등이 있다.
안말 조개더미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그물추[어망추(漁網錘)], 흑요석(黑曜石)이 발견되었다. 소래벌 조개더미에서는 시굴 조사를 통해 세로생선뼈무늬[횡주어골문(縱走魚骨文)]가 새겨지거나 무문양의 빗살무늬토기가 수습되었다. 소래벌 조개더미는 해안 구릉사면에 입지하는 다른 서해안 조개더미와는 달리 인근의 작은소래벌 조개더미와 함께 해안 사주(砂洲)에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작은소래벌 조개더미는 발견된 토기 문양을 통해 기원전 300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포동 조개더미는 정왕동 하수종말처리장 일대와 오이도 남단의 해안 구릉 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신포동 A, B 조개더미가 있는데, B조개더미의 경우 여러 조개더미가 중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층위적으로 서해안 지역의 신석기시대 편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바닥 면에서 3기의 화덕자리[노지(爐址)]가 확인되었는데, 평면 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이다.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 어망추, 돌화살촉[석촉(石鏃)], 뼈화살촉[골촉(骨鏃)] 등 신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시흥 지역에 살았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바닷가에 거주하면서 고기잡이, 사냥, 식물 채집을 통해 먹을거리를 얻었다.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작살과 이음 낚시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았다. 신석기시대에는 조, 피 등 잡곡을 재배하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식량 채집 단계에서 식량 생산 단계로 발전하였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면서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움집을 지어 정착 생활을 하였다. 돌이나 나무로 농기구를 제작하였고, 토기를 제작하여 식량의 저장과 요리에 이용하였다. 또한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하여 옷이나 그물 등을 만들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주거지인 움집의 바닥은 원형이나 둥근 사각형이었고, 가운데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하기 위한 화덕이 놓여 있었다.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이를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를 보관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농사를 짓기 위해 가족공동체를 이루었으므로 혈연 중심의 씨족들이 결합하여 부족사회를 형성하였다. 한편 신석기시대에는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농사에 영향을 주는 자연 현상이나 태양, 물 등 자연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미니즘(animism)이 생겨났다. 또한 하늘이나 영혼을 인간과 연결해 주는 무당과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shamanism)이 생겨나고,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물과 연결해 그 동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totemism)이 나타났다. 시흥 지역의 사람들도 이러한 모습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에서 시작하여 기원전 3세기까지로 편년된다. 한반도 청동기의 기원은 시베리아의 카라숙-타가르(Karasuk-Tagar) 문화에 기원을 두고 남하하면서 스키타이(Scythai)와 오르도스(Ordos) 문화를 흡수한 후 중국 만주의 랴오닝[遼寧] 문화와 결합한 복합 문화이다. 청동기시대에는 반달돌칼[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홈자귀[유구석부(有溝石斧)] 등을 포함하여 농경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국가 조직이 발전하여 부족국가가 나타났다. 청동기 문화를 성립시킨 민무늬토기인들은 우리 민족의 주인공으로서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었다. 이들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퉁구스(Tungus) 계통으로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방 일대에서 동이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수렵과 어로, 채집으로 식량을 얻었으나 농업이 경제 생활의 중심이 되어 따비와 괭이로 땅을 갈고 반달돌칼로 곡식을 수확하였다. 농경이 발달하면서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역에 살면서 근처의 평탄한 곳이나 구릉에 밭을 일구어 조, 수수, 콩, 보리 등을 경작하였고 일부 저습지에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집터는 직사각형이나 원형이었고 움집은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움집 중앙에 있던 화덕은 한쪽 벽으로 옮겨 갔다.
청동기시대에는 청동기의 전래와 농경의 발달로 생산 활동이 증대되어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였다. 생산력의 향상으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생산물의 분배와 사유화 때문에 씨족 내부에서 빈부와 권력의 차이가 조성되는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나아가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계급의 분화가 촉진되고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인 군장(君長)[족장]이 등장하였다. 당시 군장들의 권력을 표시하는 것이 시흥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고인돌[지석묘(支石墓)]이다.
시흥시에 분포하는 청동기시대 유적은 고인돌과 집터 등이 발굴된 능곡동, 정왕동, 계수동, 과림동, 군자동, 금이동, 논곡동, 매화동, 안현동, 조남동 등에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계수동 고인돌, 군자동 고인돌, 금이동 고인돌, 조남리 지석묘 등이 있다. 시흥시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민무늬토기, 반달돌칼, 간돌도끼[마제석부(磨製石斧)]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군자산 서쪽 구릉지대에서 민무늬토기 후기에 속하는 검은간토기[흑도(黑陶)] 조각이 출토되었다. 군자산 일대에서 민무늬토기 산포지 18개소가 확인되고 있다.
능곡동 선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 7기와 저장 구덩이[수혈(竪穴)] 2기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토기 아가리에 눈금을 새기고 아가리 바로 아래에도 구멍이 열을 지어 돌아가면서 뚫린 구멍무늬[공열문(孔列文)]가 함께 새겨진 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구순각목문 공열 토기(口脣刻目文孔列土器)], 민무늬토기, 석기, 붉은간토기,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받침돌[지석(支石)] 등이 출토되었다. 계수동 유적에서는 방형과 장방형 형태의 집터 4기와 저장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골아가리 토기[구순각목 토기(口脣刻目土器)], 골아가리무늬와 구멍무늬가 함께 새겨진 심발형 토기(深鉢形土器)[깊은 모양의 사발형 토기] 각 1점, 항아리형[호형(壺形)] 민무늬토기 4점, 반달돌칼 등이 출토되었다. 목감동 유적에서는 길이 15m의 가늘고 긴 직사각형[세장방형(細長方形)] 집터에서 구멍무늬 토기 및 골아가리 토기가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