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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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山郡 |
영어공식명칭 | Ansangun |
이칭/별칭 | 연성(蓮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고대,고려,조선,근대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남부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할하였던 행정구역.
[개설]
안산군은 지금의 시흥시 남부를 비롯해서 안산시 일원과 수원시 권선구 입북동, 군포시 대야동, 의왕시 부곡동 일부 등이 해당되는 행정구역이다. 고을의 치소(治所)인 읍치(邑治)는 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있었다.
[내용]
경기도 시흥시 남부가 속해 있던 안산군은 서해안 시화호 일대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예로부터 서해안 방어의 군사적 요충지이자 연안 항로의 중요한 요지였다. 고려 때 안산 잿머리의 포구는 큰 배들이 오갈 수 있는 외항으로 축조되었다. 972년(광종 23) 십수 년간 단절된 중국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서희(徐熙)[942~998]가 사신으로 송에 다녀왔는데, 서희가 송나라로 출발할 때 안산 잿머리를 이용하였다. 이때 서희가 출발하기 전 성황당(城隍堂)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여기에서 시흥 군자봉 성황제가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안산군에는 여러 사대부가 살았다.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에는 강희안(姜希顔)[1417~1464]과 강희맹(姜希孟)[1424~1483] 형제, 조선 중기에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金瑬)[1571~1648]와 장유(張維)[1587~1638], 조선 후기에는 이익(李瀷)[1681~1763]과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이 안산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안산이라는 지명 외에 세조 때부터는 연성(蓮城)이라고도 흔히 불렸다. 연성이라고 불린 이유는 1463년(세조 9)에 강희맹이 사신으로 중국 명나라의 수도 난징[남경(南京)]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전당홍(錢塘紅) 연꽃 씨를 가지고 와 관곡지(官谷池)에 심었기 때문이다.
[변천]
안산군의 처음 이름은 장항구(獐項口) 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였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 장구군(獐口郡)으로 되었다. 고려 초기 940년(태조 23) 장구군에서 안산군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수주(水州)[지금의 수원시]의 속현이 되어 안산현이 되었다. 고려 후기인 1390년(공양왕 2) 경기도가 좌·우도로 분할되었을 때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었을 때 시흥군과 인천부에 예속되었다. 다음 해인 1896년(고종 33) 13도제가 부활하면서 다시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시흥군과 수원군에 분할 편입되었다. 1995년 시흥시 화정동 일부와 장상동, 장하동, 수암동이 편입되어 지금의 안산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