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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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東一 |
영어공식명칭 | Kim Dongil |
이칭/별칭 | 지석(芝石),교원(敎源)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주혁 |
[정의]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에서 출생한 일제강점기 종교인이자 교육자.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지석(芝石)·교원(敎源).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 438[지금의 시흥시 무지내동 428]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용수(金龍洙),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아들은 민선 인천시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정렬(金正烈)이고, 사촌형은 시흥시 관내 최초의 기독교인 김동현(金東賢)이다.
[활동 사항]
김동일(金東一)[1884~1954]은 어릴 적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성균관 주사에 임명되었다. 개항과 서구 열강의 영향이 조선에 미치는 시기인 1902년(광무 6)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먼저 기독교를 접한 사촌형 김동현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 그 후 버딕(George M. Burdick)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어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졸업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이후 목회 활동에 나서 1912년부터 안산 구역을 대상으로 근속하다가 1919년에 그만두었다. 1920년부터 농사에 전념하고 30년 가까이 구장[이장]을 맡아 마을 일을 도맡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흥업강습소를 창설하고 남녀 미취학 아동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1945년 8월 광복 후에는 그동안 문을 닫았던 흥업강습소를 다시 열어 소성고등공민학교(邵城高等公民學校)로 개칭하고 1948년까지 명예교장을 지냈다. 당시 사재 토지 800여 평[약 2,640㎡]을 학교 운동장 부지로 희사(喜捨)할 만큼 기초 교육에 대한 열망이 컸다. 만년에는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954년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김동일의 묘는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 은행동마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