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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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湘大師 |
영어의미역 | Great Buddhist Priest Uisang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최연주 |
[정의]
통일신라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하며 화엄종을 개창한 승려.
[가계]
신라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 702년(성덕왕 1)에 입적하였다. 성은 김씨이며,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서 계림부(鷄林府) 사람이다.
[활동사항]
의상대사는 19세 때 황복사에서 출가하였으며, 출가한 지 얼마 안 되어 원효(元曉)와 함께 중국으로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고구려 군에게 붙잡혀 정탐자로 오인받고 수십 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661년(문무왕 1) 당(唐)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의상대사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이후 의상대사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을 찾아갔다. 지엄은 전날 밤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까지 이르렀고, 그 위에 봉(鳳)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대사를 특별한 예로 맞으며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후일 중국 화엄종조(華嚴宗祖)가 되었던 현수법장(賢首法藏)과 함께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법계원융(法界圓融)의 묘지(妙旨)를 전수받았다.
670년(문무왕 10)에 환국하였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한다. 즉, 당 고종의 계획을 김인문(金仁問)이 알아 의상대사에게 알려주자 서둘러 귀국해 문무왕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한편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그 해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 즈음 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고 관리에게 명령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대사는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 언덕 땅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오나, 정교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재해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문무왕은 역사(役事)를 중지하기도 하였다.
676년(문무왕 16)에 문무왕의 명으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일승화엄종(一乘華嚴宗)을 개창(開倉)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많은 화엄종장(華嚴宗匠)을 배출하였는데, 3천 명의 제자가 있었다. 특히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화엄대덕(華嚴大德)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등이 의상의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674년(문무왕 14)에 의상대사는 경주의 황복사에서 표훈(表訓)·진정(眞定)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의상대사가 제자들에게 화엄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 이 소문이 전국에 퍼졌고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문무왕이 이에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베풀어준 일이 있었다.
의상대사가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 공산(현 대구광역시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현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華嚴寺), 강주(현 경상남도 합천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현 충청남도 공주시) 보원사(普願寺), 계룡산(현 대전광역시) 갑사(甲寺), 계람산 삭주(현 강원도 춘천시) 화산사(華山寺), 양주(현 경상남도 양산시)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현 전라북도 전주시) 국신사(國神寺), 갱유한주(현 서울특별시) 부악산 청담사(淸潭寺) 등으로 일명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 한다.
특히 지리산 화엄사에는 의상이 부석사를 세운 이듬해 각(刻)한 진역(晉譯) 『화엄경』의 석경(石經)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밖에도 불영사(佛影寺)·삼막사(三幕寺)·초암사(草庵寺)·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오는데, 이러한 사찰들이 모두 의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의상과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범어사창건사적」에는 ‘신라 문무왕이 의상대사와 함께 이 금정산 아래에서 칠일 밤낮 『화엄경』을 독송하여 왜적 10만 병선을 물리치고 범어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 금정산은 신라의 양주(良州)[현 경상남도 양산시]에 소속되어 있었다.
[학문과 사상]
의상대사의 화엄 사상은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이다. 의상대사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 사상이 전래되어 있었지만, 화엄 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대사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의상대사가 남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라로 돌아온 그 해 낙산사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의상대사의 관음신앙(觀音信仰)을 알게 하여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 도선율사(道宣律師)와도 교유하였다. 특히 당시의 동문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신라로 돌아온 뒤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현수는 의상대사에게 자신의 저술과 서신을 보냈고, 의상대사는 현수에게 금(金)을 선물하였다. 현수는 의상대사 보다 19세 연하였는데, 지엄이 죽은 뒤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된 인물이다.
[저술 및 작품]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화엄일승법계도』, 「백화도량발원문」.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