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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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谷齋 |
영어음역 | Gaegokjae |
영어의미역 | Gaegokjae Pavilion for Purification |
이칭/별칭 | 국문재(國文齋)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개곡리 38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영옥 |
성격 | 사우(祠宇)|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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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현대식 콘크리트 주택 건물에 기와지붕 |
건립시기/일시 | 1946년|1983년[재건] |
정면칸수 | 측면칸수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개곡리 381 |
소유자 | 김해김씨 개곡 문중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개곡리에 있는 김해김씨 재실.
[개설]
김수로왕(金首露王)의 49세손 김관(金管)[1250~1348]은 자가 희범(希範), 호가 정성헌(靖醒軒)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고려 말의 문신이다. 김관의 5세손 김극일의 여섯 아들에 와서 문중은 다시 6개의 지파(支派)로 나뉘어졌다. 양산시 동면 개곡리에는 중시조 김관의 9세손이고 녹사공의 4세손이며 김옥손의 손자인 훈련원정 김경원이 1591년(선조 24) 처음 입향하여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자은(自隱) 김경원은 개곡리에 복거(卜居)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해 기장·울산간 유수전을 펼쳐 왜적을 물리쳤다. 그 공로로 선무삼등공신(宣武三等功臣)의 훈호(勳號)를 하사받았다.
김해김씨는 현재 양산시의 개곡리·용연리·삼수리·신평리·답곡리·법기리 등에 세거하고 있다. 김경원의 입향으로 개곡리에 정착한 김해김씨는 마을의 동래정씨 한 사람과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동편에는 동래정씨들이, 서편에는 김해김씨들이 살면서 지금까지 400여 년 동안 혼사를 맺지 않고 의좋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위치]
개곡재는 경상남도 양산시 천성산(天聖山) 동남단의 개곡리 중앙에 위치한다. 개곡리 입구에 들어서면 김경원이 심은 약 430년 된 왕소나무[王松木]가 마을을 대표하고 있다. 이 노송은 인근에서 보기 드문 소나무로 현재 양산시의 지정 보호수로 규정되어 있다.
[변천]
개곡김씨 문중은 입향조 김경원의 공훈과 음덕을 기리기 위해 11세손 김장식(金章植)과 12세손 김만곤(金萬坤)을 중심으로 1946년 가을 개곡리에 목조건축으로 재실을 건립하여 ‘국문재(國文齋)’라 명명하였다. 재실 건립 시기가 해방 직후였기 때문에 ‘우리의 글을 살린다’는 뜻에서 재실 이름을 ‘국문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9년 9월 17일 사라호 태풍으로 재실이 파손 유실되어, 1983년 10월 31일 12세손 김주호(金周浩)를 중심으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재건하였다. 이때 재실 명칭을 ‘국문재’에서 ‘개곡재’로 변경하였다.
[형태]
개곡재는 현대식 주택 건물에 기와지붕을 얹은 형태이다. 네 짝의 미닫이 유리 현관문 위에 ‘개곡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현관문 좌우로 각각 네 짝의 유리창을 냈다.
[현황]
재건 이후 2001년 11월 25일 조상의 위패 봉안제를 거행했으며, 현재 매년 음력 10월마다 개곡재에 모신 김경원과 그 후손들에게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개곡재는 김해김씨 개곡 문중이 입향조 이하 여러 선조들을 향사하여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정성을 다하고 족친들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는 곳이다. 또한 입향조 김경원이 임진왜란 때 보여준 충의(忠義)가 빛나는 장소이기도 하며, 김해김씨 일부가 400여 년간 양산 개곡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음을 각인시켜주는 현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