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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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菖蒲亭 |
영어음역 | Changpojeong |
영어의미역 | Changpojeong Pavilion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 327-2(현 중앙동사무소 부근)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현오 |
성격 | 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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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 327-2[현 중앙동사무소 부근]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 있는 조선 중기 정자.
[개설]
양산군수 이여익(李汝翊)이 관아(官衙)의 서편 창고 옆 연못가에 창건한 정자이다.
[위치]
남양산IC를 나와 좌회전한 후 700m 직진하면 남부 사거리가 나온다. 창포정은 남부 사거리에서 우회전한 후 800m 떨어진 중앙동사무소 인근에 있다.
[변천]
창포정과 관련된 기록인 「창포정기(菖蒲亭記)」, 「창포정중수기(菖蒲亭重修記)」와 함께 창포정에서 남긴 여러 문인들의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황호(黃㦿), 「창포정기」
비경(棐卿) 씨가 양산에 재직한 지 2년에 불초도 마침 동래에서 재직 중이었다. 동래와 양산은 지경이 서로 접해 있었으므로 양산의 부로(父老)와 자제(子弟)들이 자주 나에게 지나치면서 말하기를,
“우리 고을 성주는 치민(治民)을 하는데 먼저 자신을 다스린 연후에 남을 다스리고, 민속을 다스리는 것을 우선하고, 형벌을 다스리는 것을 다음으로 하니, 이제 다스림에 거의 할 바가 없으며, 이에 군의 관청 건물을 수치(修治)함에도 민력(民力)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성공하였으며, 또 그 정자를 새롭게 하고 그 연지(蓮池)를 다시 수치(修治)해서 창포정이라 이름하니, 우리 같은 소인은 그 정자가 새로워진 것은 즐거운 일이로되, 그 이름에 대해서는 의심되는 바 있어, 어느 날 한가한 틈을 타서 묻기를 ‘우리 고을 수목 가운데 우수한 것은 귤·유자·솔·대 등이 있고, 꽃나무 중에 아름다운 것은 사철동안 각각 그 요염한 자태를 보이는 소백(召伯)의 해당과 무후(武侯)의 동백이 또한 그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이와 같이 허다한 중에 유독 창포를 취한 것은 무엇때문입니까’라 하니, 성주(城主)께서 곧 응답하시기를 ‘이것이 마침 그러해서[適然]이다. 연지에 창포가 있기에 애오라지 우리 정자를 이름했을 뿐이다’고 하시니, 감히 다시 대부(大夫)께 청하여 우리 성주의 뜻을 짐작하셔서 소인들의 의혹을 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라 하였다.
내 드디어 대답하기를 “그러하리다. 너희들의 성주의 말을 이른바 적연(適然)이라 한 것은 진실하다. 대저 적연이란 것은 자연(自然)이니, 군자의 치정(治政)은 지치(至致)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 또한 곧 자연을 본받는 것일 뿐이다. 어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리오. 아, 비경 씨는 진실로 장자로서 치정의 근본을 아는 분이로다. 비록 그러나 나의 창포의 설은 미루어 헤아리면 거듭 얻는 바 있을 것이다. 군자는 물건을 보고 생각하는 바가 있나니, 뜰에 심은 풀 한 포기도 선유는 뽑지 않았는데 거기에 생생지리(生生之理)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저 자연물도 생생하고, 나도 생생하나니 분수(分數)는 원래 다르나 생식하는 자연의 이치인즉 동일하다. 나로부터 자연물에 미쳐서, 능히 나로부터 확대할 줄 아는 것이 인이오, 이것을 보고 저것을 알며, 느껴서 통하는 것을 신이라 하나니, 비경 씨는 이런 이치를 이미 알고서 이 같은 이름을 취한 것이리라. 내 또한 듣건대, 약학(藥學)에 이르기를 창포는 영약이므로 사람의 병을 능히 다스릴 수 있고, 또 스스로의 병을 다스려 장생한다고 하였으니, 비경 씨의 뜻하는 바는 그 장차 그대의 읍민(邑民)의 고폐(痼弊)를 치료하고 나아가서는 나라를 치유함에 이르러 이 나라 생민(生民)을 함께 평안 장수케 하리라는 뜻일 것이다.
예로부터 어진 관원은 이런 좋은 약재를 써서 치병(治病)의 방편으로 삼았는데, 지금 양산의 민인(民人)은 때를 얻었음이로다. 비록 방편은 훌륭해도 시행하는 관원은 드물더니 비경 씨가 이런 이치를 취하여 반드시 이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회고하건대 나같이 불민한 가루로 된 약재로써야 적용할 곳도 없고 또 이미 늙어서 치사(治事)하는 데도 숙달하지 못하니 비경씨의 대역은 쉬이 할 수 없다. 나같이 경솔하고 주의가 부족하며 지리멸렬해서야 어느 겨를에 정자와 연지를 수치할 수 있겠는가.
내 비경 씨의 풍성을 듣고 기꺼이 여겨 그가 거처하는 소재(小齋)에 나아가서 봉래선각(蓬萊仙閣)이라 재명(齋名)한 것을 문득 보고 생각컨대 장차 영약을 얻어 장생을 구하려 함에 뜻이 있었다고 여겼도다. 내 알지 못하겠노라. 비경씨는 나에게도 기꺼이 그 영약을 나눠줄 것인지 아닌지, 너희가 나를 위하여 소개하여 줄 것이냐”고 하였다. 이에 양산의 부로(父老)와 자제가 석연히 알아듣는 것 같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 군수의 이름은 여익(汝翊)이요, 비경은 그의 자이며, 일찍이 중앙관서의 관재(官材)가 되었고 또 웅대한 고을의 성주가 되었는데, 양산은 벽향소읍(僻鄕小邑)이니 족히 여기에서 재능을 다할 수 있으리라. 인조 23년(1645) 11월 동래부사 황호(棐卿氏治梁之二年 而余不侫 適待罪東萊. 萊梁壤地相錯 梁父老子弟 過余而記曰 吾侯之爲治也 自治而治人 治俗而不治刑 今無所爲於治矣 乃治郡之舘廨 不使民治 而旣集功 又新其亭 而治其池 而名以菖蒲. 吾小人者 樂亭之成 而竊疑其名 他日請間問曰 吾鄕之樹木之秀者 有橘柚松篁之屬 花卉之佳者 四時各逞其艶 抑召伯之棠 武侯之栢 匪厥美乎 而獨也取斯焉奚. 吾侯直應之曰 是適然耳. 惟池有蒲 聊以名吾亭而已. 敢復請大夫 願有以導吾侯之志 而解小人之惑也. 余遂應之曰 然. 汝侯之所謂適然者固耳. 夫適然者 自然者也. 君子之爲治 而至於至治也 亦因其自然而已. 豈有爲而爲哉. 嗟棐卿氏 誠長者知治軆哉. 雖然 余于菖蒲之說 乃忖度而佹得焉. 君子有觀物之術 庭草非異物也 先輩不除 所以觀生生之理也. 夫物生生 我亦生生 分固殊矣 理則一也. 由我而及物 惟以能擴之謂仁. 觀此而知彼 感而遂通之謂神 棐卿氏其有得於斯 而斯之取歟. 且余聞之 本草有曰 菖蒲靈藥也 治人能己疾 而又長生 棐卿氏之志 其將醫汝邑之民 以至于醫國 使斯民共躋之壽域也歟. 古者良吏 有用此爲鞭者 今梁之民 幾格矣. 雖鞭之長 無所施矣. 棐卿氏之取之 必不去此也. 顧余不侫散材 不適於用. 老不習治事 無能爲棐卿氏役 鹵莽而滅裂之 奚暇治亭池哉. 聞棐卿氏之風而悅之 就所居小齋 輒名以蓬萊仙閣 盖將乞靈藥 而求長生也. 余不知棐卿氏其肯分我刀圭乎否. 汝其爲我紹介. 於是梁父老子弟 如釋然者 而亦應之曰諾. 李侯名汝翊 棐卿氏其字 嘗爲臺府官材 又嘗爲雄州倅材 梁故鄙小縣 此足以盡其材哉. 仁祖 二十三年 十一月 東萊府使 黃㦿)."
○이만도(李晩燾), 「창포정중수기」
"양산은 읍이고, 읍에는 창고가 없을 수 없으며, 창고가 있으면 청사가 없을 수 없다. 이런 연고로 군수 이여익 공이 이 정자를 전쟁의 불길이 휩쓸고 간 뒤에 지었던 것이다. 이제 만랑 황호 공의 기문을 살펴보면 창포의 뜻을 갖추어 기술하였는데, 쌀을 들이고 내는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창고를 혹 중년에 지었고 정자는 본디 창고를 위해 창설한 것이 아니어서일까. 만약 한갓 상쾌함을 취했다면 쌍벽루가 모자라서 여기에 중첩하여 창설했을까. 이는 참으로 알 수 없으나, 이제 이공의 시대로부터 334년이니, 정자가 없어진 것을 어찌 괴이하게 여기랴! 다만 이 정자가 일을 경영하고 물자를 모음에 있어서 이공과 같은 이가 다시 있을 때에 폐기되지 않고, 이제 아무런 계산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손을 기다려 중건하려고 한 것은 이 정자가 사람을 잘 만난 것이다.
지난 해 감옥과 여단과 양사재를 수리하고, 이제는 향교와 감동창을 아울러 수리하는데, 공사가 많으면 힘이 분산되고 힘이 분산되면 공사에 전심할 수 없다. 그래서 9가의 집을 6가로 줄이니 옛날의 제도가 없어졌다. 계좌에서 간좌로 바꿈은 지운에 어울리게 함이나 그래도 예전 그대로 한다는 뜻에 흠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능히 청계당이 있는 곳을 아는 자 있는가. 이 당을 폐기하고 일으키지 않는 것은 마치 방당을 덮을 수 있는데도 살펴 다스림을 소홀히 함과 같은 것이다.
들보의 좀먹은 사이에서 상량문이 나왔는데 어떤 사람이 지은 글인지 알 수 없는 낡은 문서이기에 본디 있던 곳에 봉하여 도로 넣었고, 들보에다 창건한 사람의 성명을 줄지어 썼는데 자획이 새로 쓴 듯하다. 그래서 지금 이름으로 그 아래에 잇달아 쓰기를, “이공으로부터 334년이 되도록 국가가 편안하고 정자도 이로 인해 장수하였는데, 이제부터 또 334년 연장하여 지금 사람들이 탈 없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면 또한 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구천의 옥당(玉堂)지기인 석창포는 근래에 평안한지 이 정자가 비록 궁벽하고 누추하나 옥당에서 온 지 오래되었으니, 창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다만 생각건대 나는 옥당에서 벽곡의 방도를 얻지 못하고, 뻔뻔스럽게 이곳에서 관리노릇을 하고 있으니 창포정에 신의를 저버린 점이 많다. 그러나 일찍이 듣건대, 창고가 실해야 예절을 안다고 하였으니, 백성을 오래 살게 하는 도리는 푸른 줄기의 이무기와 같은 아홉 마디의 창포에 있지 않고, 창고를 실하게 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백성이 진실로 편안하지 않다면 창포정인들 어떻게 홀로 보존되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창고는 우리 백성의 창포이다. 또한 이곳에서 정치를 하는 자는 능히 ‘나무에 빨리 감응된다[敏樹]’는 뜻을 알고서 창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한다면, 교화되기 쉬운 백성이 또한 정치하는 자의 창포가 되지 않겠는가. 내 말을 못믿겠거든 물 속에 물어보고, 물 속에도 못믿겠거든 뒤에 올 선관에게 물어보라.” 무인(戊寅, 1878) 천중절(天中節) 진성(眞城) 이만도(李晩燾) 삼가 씀(梁邑邑 邑不可無倉 旣有倉 倉亦不可無廳. 此故 郡守李公汝翊 所以構斯亭於兵火震蕩之餘者也. 今按 黃萊伯㦿記 備述菖蒲之義 而糶糴事不小槪見 倉或作於中世 而亭本非爲倉設者耶. 若爲徒取爽塏 而不足於雙碧 而有此疊設歟. 是固未可知 而今去李公三百三十四年 亭之廢 何足怪哉. 第其不廢於經事綜物 復有如李公者之時 待此無所計度 如吾之手 欲蘄重葺者 此亭之遭也. 昨歲修獄犴厲壇養士齋 今與鄕黌 甘同倉幷治 役多而力分 力分而工不專 所以九架減爲六架 制度則廢矣 改癸背艮叶地運 尙欠仍貫之意. 然人能識淸溪堂所在處者否 與斯堂之廢而不興 猶足以葆方塘而鑑治忽也. 有偉文出樑蠹間 不知何人所作 古墨也. 封還本處樑 列書創建人姓名 字畵如新 因以今名繼其下 曰 自李公三百三十四年 而國家安寧 亭以壽老 自此又延三百三十四年 而今人無恙復出亦足矣. 然九天玉直石菖蒲 近平安耶. 斯亭雖僻陋 由玉直來久矣. 菖蒲 其所也. 第念吾於玉直 未得辟穀之方 强顔爲吏 於此其負菖蒲多矣. 然嘗聞倉廩實而知禮節 壽民道 不在於靑其莖虯其節之菖蒲 在乎倉廩之實而以在也. 民苟不安 菖蒲亦安得獨存耶. 余故曰 倉廩吾民之菖蒲也. 且爲政於斯者 能知敏樹之義 而以愛菖蒲之心愛民 易化之民 又非爲政者之菖蒲乎. 吾言不信 問諸水中 水中不信 質諸後來仙官. 戊寅天中節 眞城 李晩燾 謹記)."
"정자 앞에 네모난 거울 누굴 위해 단장하나./ 그림자 속 신령한 뿌리 붉은 뿔을 토했네./ 일이 없어 채찍 하나 끝내 쓸모없고/ 부질없이 일천 개 칼이 부용을 비추네(亭前方鏡孰能鎔 影裏靈根吐紫茸 無事一鞭終不用 漫留千劒照芙蓉)."
"온 뜨락에 봄의 사물이 절로 빚어져/ 십리 우거진 둑에 가는 풀이 돋았네./ 염계거사 가진 뜻을 상상하고서/ 네모난 연못 반 뙈기에 부용을 심었네(一庭春物自陶鎔 十里平坡細草茸 想得濂溪居士意 方塘半畝種芙蓉)."
○김정(金廷)
"네모난 연못 거울 같아 푸른 물결 늠실대고/ 창포는 난간 곁에 기대 줄기 언제나 푸르네./ 좋은 술병 다시 씻어 작은 술자리 마련하고/ 새 달을 맞이하여 부용을 보려네./ 대나무에 찬 기운 일어 옥처럼 울리고/ 새 부들 푸른 잎 내어 칼처럼 어른거리는데/ 채찍 하나 하루 종일 처마 끝에 달려서/ 태수의 한가한 정취 점차 높아지누나(方塘如鏡綠波鎔 蒲倚欄邊長翠茸 更洗芳樽開小酌 擬邀新月看芙蓉 瘦竹生寒鳴似玉 新蒲抽碧嫩如刀 一鞭永日簷枝掛 太守閑情漸覺高)."
"옛 정자에 새로 덮어 창포를 심고/ 술병에 술 다하니 그대 다시 사오소./ 오늘의 풍류는 능히 냄새 알지니/ 앞 사람 남긴 향기 외롭지만 않네./ 그윽한 교분 맺어 옥국을 남겨 놓았으니/ 신령한 약을 현도에 가져가지 마시오./ 봄 되면 우리 백성 구휼한 책임/ 온갖 풀 시들 적에 비이슬 고루 입히리(舊亭新葺植菖蒲 酒盡壺中君且沽 今日風流能識臭 前人遺馥未全孤 已結幽盟留玉局 休將靈藥向玄都 方春賑貸吾民責 雨露均蒙百草枯)."
○이정경(李鼎卿)
"정자 앞에 네모난 거울 누가 만들었던가./ 그림자 속에 드러난 뿌리 붉은 녹용 토하고/ 일 없어 채찍 하나로도 끝내 사용하지 않고/ 부질없이 천 자루 칼을 남겨 부용꽃을 비추네(亭前方鏡孰能鎔 影裡露根吐紫茸 無事一鞭終不用 謾留千劍照芙蓉)."
"관가의 뜰이 적적하여 풀이 뾰족뾰족한데/ 연못물이 시원하게 객의 얼굴을 비추네./ 푸른 섬돌에 어지러운 뿌리 아홉 마디 밀고 나와/ 깨끗한 발 구슬 같은 이슬이 부용에 버금가네./ 도인의 정 신선의 완상이 아름다운 뿔에 있나니/ 흰 물 긴 하늘과 한 모습이로다./ 다시금 창에 스며 장애 없는 곳에/ 모름지기 면면마다 부용꽃을 보시게./ 봄이 와서 몇 마디 새 뿔을 내었나./ 화급하게 단약 지어 모년의 얼굴 멈추네./ 도리어 의심스러운 건 금정 위로 날아가/ 신선 벗을 맞이하여 부용 꽃 완상하려나(官庭寂寂草蒙茸 池水冷冷照客容 綠砌亂根抽九節 灑簾珠露亞芙蓉 道情仙賞在芳茸 白水長天共一容 更透入窓無碍處 要須面面看芙蓉 春來幾節放新茸 火急成丹駐暮容 却疑飛登金井上 共邀仙侶賞芙蓉)."
"네모 연못 사면으로 푸른 싹이 돋아나서/ 구름 그림자 하늘빛이 수면에 함께 했네. / 정자 이름 지금은 바꿔 달아야 하겠으니/ 창포를 심지 않고 부용을 심었기에(方塘四面綠苗茸 雲影天光共水容 亭號卽今宜換揭 菖蒲不種種芙蓉)."
"연못에 달빛을 담아 금빛이 어른거리는데/ 정자 속에 가득한 향기 언제나 푸른 뿔이로다./ 가장 좋은 건 난간에 기대어 보고 가까이 못함이니/ 사방의 창문 열어둔 곳에 부용꽃이 둘렀구나(池涵月浪嫩金鎔 亭裏滿香長翠茸 㝡是倚欄看不褻 入窓開處繞芙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