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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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동철 |
소재지 | 은해사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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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은해사(銀海寺)는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사찰로, 은해사가 자리한 팔공산은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동구·군위군과 경상북도 영천시·경산시·칠곡군에 걸쳐 있다. 갓바위를 경계로 대구 쪽으로는 동화사(桐華寺)가 있고, 영천 쪽으로는 은해사가 팔공산의 대표 사찰로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은 중악(中岳)·부악(父岳) 등으로 불려져 온 영남 지역의 명산으로, 토함산[동악]·계룡산[서악]·지리산[남악]·태백산[북악]과 더불어 신라오악(新羅五岳)의 하나로 손꼽혔다. 특히 팔공산은 ‘중악’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팔공산이 신라의 중심지적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팔공산은 신라 호국성신인 오악의 하나로서 신라의 상징적인 존재로 국가차원에서 숭배되어 온 영산(靈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령스러운 땅에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는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되었으며,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원찰지(圓刹地)로서 원찰과 원탑(願塔) 조성 등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제사지(祭祀志)」에 보면, 신라는 산악을 신격화하여 호국신군으로 받드는 산악숭배사상으로서 삼산(三山)과 오악(五岳)을 두었는데, 이를 대사(大祀)와 중사(中祀)로 하여 국가 최상의 제전으로 삼았다.
곧 신라의 대사삼산(大祀三山)과 중사오악(中祀五岳)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확장되는 신라 세력을 상징하는 신라 최고의 호국성신(護國聖神)이었던 것이다.
이 흐름은 고려 시대에서도 계속되어 고려의 초조대장경(初彫大裝經)이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되고, 유가종(瑜伽宗)의 거봉인 홍진국사(弘眞國師) 혜영(惠永)·자정국사(慈靜國師) 자안(子安)은 동화사(桐華寺) 주지로서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이 땅의 불교를 호령하였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 시대에도 은해사는 인종 태실(胎室)의 수호 사찰로, 파계사(把溪寺)는 영조의 장수를 비는 원찰로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등 팔공산의 법등은 계속 밝혀져 왔다.
은해사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내 암자를 둘러보는 것은 팔공산의 자연을 만끽하는 산길이지만, 팔공산에 스며 있는 우리의 역사와 불교의 가르침이 함께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은해사는 수년 전부터 템플스테이를 상시 운영 중이다. 은해사에 머물면서 은해사 산내 암자를 중심으로 팔공산의 동쪽 편을 찬찬히 둘러보면 팔공산의 산세와 어우러진 우리나라 불교미술을 감상하는 또 하나의 노천박물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은해사와 산내 암자]
1. 은해사
은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교구 본사 가운데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신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은해사는 809년(신라 헌덕왕 1)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 하였다. 헌덕왕(憲德王)[재위 809~826]은 조카인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는데,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가는 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해안사는 운부암(雲浮庵) 길 부근 해안평에 자리하였었다.
팔공산을 대표하는 은해사는 본사다운 규모를 지녔다. 현존하는 산내 암자만 8개소가 있고, 소속된 말사가 39개소, 포교당이 5개소에 이르며, 한국 불교의 강백(講伯)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은해사라는 이름은 불(佛)·보살(菩薩)·나한(羅漢)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마치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심 불전인 대웅전 앞쪽에 보화루(寶華樓)가 있고 그 사이 양쪽에 심검당(尋劍堂)과 설선당(設禪堂)이 자리하면서 중정(中庭)이 형성되어 중정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 중정은 중간에서 계단으로 구획되어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보면 정방형으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느껴진다. 대웅전 앞에 오층석탑이 있던 것을 계곡 건너편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은해사와 관련된 고승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신라 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연 화쟁국사(和諍國師) 원효(元曉) 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義湘) 스님이 있고, 고려 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宗祖)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 스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신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스님 등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홍진국사(弘眞國師)가 머문 뒤부터 선교(禪敎) 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寺格)이 높아졌고, 화엄학의 대강백인 영파(影波) 성규(聖奎)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 화엄교학의 본산이 되었다. 최근에도 향곡(香谷)·운봉(雲峰)·성철(性澈) 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善知識)을 배출하였다.
현재는 비구 선방 운부암(雲浮庵)과 기기암(寄寄庵), 비구니 선방 백흥암(百興庵) 등에서 100여 분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신다. 또한 한국불교 최고의 경률론 삼장법사과정인 대한불교 조계종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10여 분의 석학들이 정진 수학 중이다.
해안사와 은해사의 사역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다. 해안사 창건 후 고려 시대인 1270년(원종 11)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충렬왕 1)에 원참(元旵) 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1485년(성종 16) 죽청(竹淸)과 의찬(義贊) 스님이 묘봉암(妙峰庵)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인종 1)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명종 1)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天敎和尙)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이후 1563년(명종 18)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인 1564년 묘진(妙眞)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선조 22)에 법영대사(法英大師)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1651년(효종 2)에 각 전각들이 단청 불사를 시행한 기록으로 보아 왜란을 겪으면서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하다. 1712년(숙종 38)에는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1761년(영조 37)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고, 1772년(영조 48)에는 자암(慈庵) 스님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道峰) 스님이 영산전(靈山殿)과 시왕전(十王殿)의 불상을 개분(改粉)했다. 영조는 왕자 시절에 이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完文)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영조 등극 후에 어제 완문(御製完文)이라 하여 이 절을 수호하는 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였다.
1847년(헌종 13)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불이 났는데, 이때의 화재는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극락전(極樂殿)을 제외한 천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인종의 태실 수호 사찰이며 영조의 어제 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털어내 시주했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그리하여 수만 냥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3년여의 불사 끝에 1849년(헌종 15)에 중창 불사가 마무리되었다. 이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향실·고간·심검당·설선당·청풍료·보화루·옹호문·안양전·동별당·만월당·향적각·공객주 등인데, 이 중 대웅전과 보화루, 그리고 ‘불광(佛光)’이란 편액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글씨로 채워졌다. 이때 추사는 경상 감사로 부임한 그의 생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경상도 일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1879년(고종 16)에 영천 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연혁변(銀海寺沿革辯)」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고 있다.
한편,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은해사를 중심으로 암자와 말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성보문화재를 수집해서 도난과 훼손을 방지하고 체계적으로 보존·관리·전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2005년 5월에 개관하여 많은 불자들이 방문하는 은해사의 주요 시설이 되었는데, 규모는 건평 140여 평의 전면 9칸, 측면 5칸의 전통 목조 건축 형식에 실내 전시 공간을 비롯하여 학예실과 수장고 등이 마련되어 있다.
2. 백흥암
은해사 사역(寺役)을 지나면 곧바로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은 기기암, 오른쪽은 백흥암이다. 백흥암 쪽으로 오르면 중암암(中巖庵)을 지나 능성재까지 이르게 된다.
백흥암은 873년(신라 경문왕 13) 창건하여 처음에는 송지사(松旨寺)로 불렸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1546년(명종 1)에 인종의 태실(胎室)을 팔공산에 모시게 되자 백흥암을 수호 사찰로 정하고 크게 고쳤다고 한다. 백흥암과 은해사 사이의 태실봉에 인종의 태실이 있다.
백흥암 극락전은 보물 제79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극락전은 1643년(인조 21)에 지은 것으로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안쪽 천장은 가운데를 높이고 주변을 낮게 만들어 층을 이루게 꾸몄으며, 불상을 올린 불단[수미단]은 조각이 매우 특이하고 우수하여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흥암은 비구니의 수도 도량으로 평소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지만, 부처님 오신 날 하루 개방될 때면 지금도 극락전과 수미단을 보기 위해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고 있다.
3. 중암암
백흥암을 지나 능성재 방향으로 올라가면 중암암이 있다. 중암암은 834년(신라 흥덕왕 9)에 왕사 심지(心地)가 창건한 수도 암자로, 1834년(순조 34) 우일(宇一)과 유엽(有曄)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객사(客舍)가 바위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삼층석탑과 석등이 사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삼층석탑은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는데, 높이 3.7m이며, 석등은 높이 1.2m의 장방형으로 장식이나 기교를 가하지 않은 특이한 석등이다. 이 밖에도 도괴된 부도 1기가 있다.
중암암 주변에는 삼인암(三印巖)·건들바위·장군수(將軍水) 등이 있다. 건들바위는 옛날 한 승려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큰 바위가 암자로 굴러 떨어지려고 하므로 급히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자 바위가 다시 떠올라 훨씬 뒤의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은 것이라 한다. 장군수는 김유신(金庾信)이 17세 때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물맛이 매우 뛰어난 석간수이다.
4. 운부암
백흥암 아래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들어가면 운부암(雲浮庵)에 이른다. 운부암은 711년(신라 성덕왕 10)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창건할 때 서운(瑞雲)이 하늘에 떴다 하여 운부사(雲浮寺)라 했다 한다. 보화루(寶華樓)의 현판 기록에는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큰 화재를 입었고, 1631년(조선 인조 9)에 지조화상(知照和尙)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선방인 운부난야(雲浮蘭若)와 요사채 우의당(禹義堂)이 있고, 그 앞으로 보화루가 배치되어 있는데, 1862년(철종 13)에 지은 「운부암중건기」의 기록을 통해 관음전인 원통전은 1862년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원통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보물 제514호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이 모셔져 있고, 불단 후벽에는 1862년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1989년 조성된 지장탱·신중탱이 걸려 있다.
누각인 보화루는 1900년에 중건된 것으로, 내부에 운부암의 역사를 기록한 「운부암중건기」, 「장등시주문」, 「선사백초당성우지진찬」, 「팔공산운부암중수기」 등의 여러 편액이 보관되어 있어 운부암이 예로부터 고승 대덕(大德)과 선지식(善知識)들이 두루 거쳐간 수행처임을 증빙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던 경허(鏡虛) 스님을 비롯하여,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동산(東山)·운봉(雲峰)·성철(性澈) 스님 등이 이곳 운부암에서 수도하였다.
원통전의 금동보살좌상은 보관(寶冠)을 나무로 만들어 얹은 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02m, 재료는 청동이다. 얼굴은 사각형으로 넓적하며 무표정하고 눈은 가늘고 코와 입은 작은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하체는 역시 굴곡이 없이 수평으로 처리되었으며, 천의(天衣)는 양 어깨를 덮은 두꺼운 통견(通肩)이며 법의(法衣)와 유사하다.
가슴·배·어깨·하체 등에 강조한 전신의 달개[瓔珞] 장식은 장엄하다. 목에는 형식적으로 삼도(三道)를 표현하였고, 가슴 밑에는 띠로 묶은 매듭이 있으며, 옷주름은 양 다리에 대칭으로 흘러내려져 있는데, 조선 초기에 유행한 화려한 장식에 단엄한 보살상이다.
5. 거조암
거조암(居祖庵)은 은해사에서 북편으로 직선 거리 4km가량 떨어져 있다. 거조사(居祖寺)라고도 하며, 지금은 은해사의 산내 암자이나 은해사보다 이른 시기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거조암은 고려 시대 지눌(知訥)이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수선사(修禪社)를 세워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룩하기 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몇 해 동안 수행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1182년(명종 12) 지눌은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동료들과 함께 선정(禪定)을 익히고 힘써 지혜를 닦자는 맹서의 글을 지어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 후 1188년(명종 18) 봄에 거조사의 주지 득재(得才)가 지난날 결사를 기약했던 수행자를 모으고, 당시 경상북도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머물렀던 지눌을 청하여 처음으로 이 절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결사는 송광사로 옮겨갔다.
1298년(충렬왕 24) 원참(元旵)이 밤중에 낙서(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懺法)을 전수받았다 하여 미타 기도 도량으로 크게 부각되었으며, 근래에는 나한 기도 도량으로서 3일만 지성껏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많은 신도들이 찾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靈山殿)과 두 동의 요사채가 있는데,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려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尙彦)이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중 법계도(法界圖)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그 하나하나의 모양이 특이하고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영산전 앞에는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3.6m의 삼층석탑 1기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6. 수도사
수도사(修道寺)는 647년(신라 진덕여왕 1)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함께 창건했다고 하나 원효는 648년에 승려가 되었으므로 자장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이름은 금당사(金堂寺)였다고 하며, 1296년(고려 충렬왕 22)에 중창하고, 1805년(조선 순조 5)에는 징월(澄月)이 중창하였다. 건물로는 원통전과 산신각·승방 등이 있는데, 원통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이 좌상으로 모셔져 있고, 불상 뒤에는 후불탱화와 지장탱화·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수도사는 본래는 산문(山門)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약사신앙의 성지인 동봉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에 있고, 수도사 위쪽에 치산폭포가 절경을 이루어 등산객이 사시사철 붐비는데, 수도사를 중심으로 일대를 치산관광지로 꾸며 개발하고 있다.
수도사는 괘불이 유명한데, 보물 제12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도사 괘불’은 1704년(숙종 30)에 그려진 노사나불로서, 1822년(순조 22)에 한 차례 개수하였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원만상 보살 형태의 독존 형식으로,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연꽃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며, 보관 주위에는 비로자나불 형태의 화불이 둘러서 있다. 굵은 윤곽선에 비해 세부선을 정밀하게 표현하여 선의 강약이 좋고, 팔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화려한 오색 방광(放光)과 길게 흘러내린 검은색의 보발(寶髮)이 노사나불의 형태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7. 진불암
수도사에서 치산폭포를 지나 동봉 쪽으로 오르다 보면 진불암(眞佛庵) 안내판을 맞게 된다. 진불암은 고려 시대 때 국사를 지낸 혼수(混修)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보각국사(普覺國師) 환암혼수(幻庵混修)[1320~1392]인지는 알 수 없다.
진불암은 1637년(조선 인조 15) 이응선(李應善)이 중창하였으며, 1920년 석담(石潭)이 다시 중창하였다. 현재 건물로는 인법당과 산령각, 요사 등이 있으며, 특별히 전해지는 유물은 없으나 치산폭포를 지나 동봉으로 오르는 산행길이어서 항상 등산객과 신도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또 팔공산의 북쪽 편이고, 주변에 제2석굴암에 버금가는 석굴사원이 있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어 향토 사학자들의 관심이 항상 고조되는 자리가 되고 있다.
[은해사 템플스테이]
은해사는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연중 상시 운영하고 있다. 템플스테이가 산사(山寺)의 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라면, 은해사에서는 공양 시간만이 정해져 있을 뿐 나머지 시간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어 팔공산의 불적과 산세를 살피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되는 듯하다.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불심을 화두삼아 하룻밤을 천년 고찰에서 보내는 것도 또 하나의 좋은 경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