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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쟁패의 현장, 국원성과 충주 고구려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131
한자 三國爭覇-現場-國原城-忠州高句麗碑
영어의미역 Gukwonseong Fortress and Chungju Goguryeo Ste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최근영

[개설]

국원성은 고구려가 평양 천도 후 남진을 계속하여 5세기 전반 충주 지역을 점령하고 설치한 수도 다음 가는 부도(副都)였다. 고구려의 남방 경영 책원지이자 신라 공격의 전초기지였다. 충주 고구려비는 이러한 고구려 남진 정책의 성공을 기념하는 비로,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여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한 것은 충주 지역이 갖춘 제반 여건 때문이다. 충주는 육로와 수로를 통한 남북 간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한 남한강 유역의 충적평야는 풍부한 물적·인적 자원을 제공하고 있었고, 충주 지역에서는 고대 전쟁에서의 필수품인 철과 동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었다. 충주의 요충지로서의 이러한 여건은 이후 삼국통일의 향방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했다.

고구려와 신라는 국운을 걸고 충주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싸웠다. 신라 진흥왕국원성을 장악하였고, 신라 영역으로 편입된 국원성은 신라에서도 부도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면서 중원 문화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국원성을 발판으로 삼아 삼국통일에 이르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반면 국원성을 상실한 고구려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고구려의 국원성 회복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남진과 장수왕의 충주 점령]

고구려의 남진은 소수림왕 때 율령 반포 등을 비롯하여 내정을 정비하고 북방의 위협 요인이었던 전진(前秦)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하는 등 대내외적 정비 이후에 추진되었다. 고구려는 376년(소수림왕 6)부터 시작하여 광개토대왕[391~413], 장수왕[413~491], 문자왕[491~519] 때까지 계속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백제 지역 공격에는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침공 때 고국원왕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복수심이 작용하였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의 백제 공격은 공세적이 되었다. 392년 7월, 고구려 4만 군대는 서현 등 10여 성을 탈취하였고, 동년 10월에는 군사 요충지인 관미산성을 함락시켰다. 396년에는 고구려의 5만 병력이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백제 아신왕은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奴客, 신하)이 되겠다.”는 치욕적인 맹세를 해야 했다. 이 정벌에서 고구려는 58성과 700촌을 점령하고 백제의 왕제(王弟)와 대신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고구려로부터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하여 백제의 아신왕은 왜·임나가야를 동원하여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나아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연합군의 공격에 밀린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5만 병력을 파견하여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와 임나가야까지 진격했다. 이때 고구려의 남방 진출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광개토대왕을 이어 즉위한 장수왕은 남방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 황해도·경기도·충청도 지역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 고구려의 남천에 불안을 느낀 백제 비유왕은 433년 신라 눌지왕과 나제공수동맹을 체결했다.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에 위협을 느끼던 백제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격분한 장수왕은 475년 9월 3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백제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살해한 뒤 남녀 8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한성을 점령당한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옮겨야 했다. 이로써 한강 유역은 완전히 고구려 영역으로 넘어갔다. 당시 고구려의 남방 영역은 경기 지역의 남양만·화성·안성·여주·이천 일대와 충청도의 진천·음성·괴산·충주·단양 지역에 이르고 있었다. 또한 481년 장수왕은 말갈병을 이끌고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청송 등 7성을 탈취했다.

이렇듯 고구려는 100여 년에 걸친 남진 정책으로 남한강 상류의 중원 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충주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충주 지역이 갖춘 군사·정치·경제·교통 등에서의 제반 조건이 기존 점령 지역을 경영하고 이후 추진될 신라 정벌의 책원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주에 국원성이 설치된 시기]

백제 영역이었던 충주가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광개토대왕 때 설치되었다는 설과 장수왕 때 설치되었다는 설로 나뉜다. 광개토대왕 때 설치되었다는 설은 광개토대왕비에 근거하여 396년에 고구려가 충주를 점령하고 396~427년 사이에 국원성이란 행정 지명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이 수군 5만을 이끌고 백제의 한성을 함락할 때 정복한 한강 유역의 58성과 700촌 중에서 고모루성의 위치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58성에는 충주 지역에 해당되는 성이 존재하지 않고 이 성들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다행히도 충주 고구려비에 기록된 고모루성이 광개토대왕비에도 보인다. 고모루성 비정에 대해서는 충청북도 음성군의 고산성으로 보는 설과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고모리 고모산[해발 380m] 정상부에 위치한 ‘고모리산성’으로 보는 설이 있다. 고모루성을 음성의 고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충주와 가까운 곳이라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이로 미루어 충주도 광개토대왕 대의 고구려 점령 지역에 들 수 있는 개연성이 있으나 결정적 증거는 될 수 없다.

이상의 정황으로 미루어 장수왕 때 충주에 국원성이 설치되었다고 보는 설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 먼저 광개토대왕비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군대를 대부분의 점령 지역에서 철수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점령한 58성과 700촌은 주로 예성강·임진강 하류와 경기도 동북부 및 충청도 일부 지역에 있었다. 고구려는 이들 점령 지역을 지배하지 않고 백제를 위협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이들 지역을 행정적으로 통치하지 않았고 더 이상의 남방 진출도 추진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대륙 북방에서 후연(後燕)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장수왕 대에 한강 유역이 백제의 행정적 지배를 완전히 벗어난 지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백제는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을 버리고 공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한강 유역을 확보한 장수왕으로서는 정복 지역의 통치와 남방 경영에 필요한 행정구역을 설치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을 것이다. 이때 장수왕이 충주에 국원성이란 지명을 부여하고 행정구역으로 편입한 것으로 본다.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한 후 고구려는 국원성을 70여 년 동안 남방 경영의 책원지로 삼고 신라 공격의 발진 기지로 활용하였다. 장수왕을 이어 즉위한 문자왕은 여세를 몰아 북으로는 494년 부여를 완전히 병합하고, 남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동해안의 울진·영해·영덕·청송까지 진출했다. 백제 방향으로는 남양만·조치원·연기 등지까지 진출함으로써 고구려의 남방 진출선은 남양만으로부터 조령·죽령·울진·영덕에 이르게 되었다.

[신라 진흥왕의 국원성 점령]

고구려의 국원성 설치에 위협을 느낀 백제 성왕은 나제공수동맹에 의거하여 신라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하류 6군을 탈환하였고, 신라는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충주·제천·가평·원주 등 10군을 점령하였다.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 남진 정책의 전초 기지를 탈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551년(진흥왕 12) 단양신라적성비를 세우고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단양신라적성비에는 적성 공략에 공을 세운 사람과 그 가족에게 후한 상으로 보답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단양신라적성비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기념하는 동시에 지역 주민들에게 북진 정책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국원성을 장악한 후 진흥왕은 친히 국원성을 순행했다. 신라 북진의 거점이 될 수 있는 국원성 장악을 통해 신라의 국력과 그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한편 점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진흥왕이 하림궁에서 우륵의 가야금 연주를 들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진흥왕은 계속 북진하여 553년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6군을 탈취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555년에는 친히 북한산을 순행하여 북한산비를 세운 후 함경도까지 진출하였다.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진흥왕은 557년 국원성국원소경으로 개칭하고 다음해는 신라 중앙 귀족의 자제와 6부의 호민(豪民)을 국원소경으로 이주시켰다. 이로써 국원소경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 다음가는 부도로서 명실공히 군사·정치·문화의 도시가 되었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기지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신라는 문무왕 때인 673년에 국원소경에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2,592보였다고 한다. 이 규모는 591년에 쌓은 왕도의 남산성(2,854보)에 버금가며, 685년에 쌓은 북원경성(1,031보)의 2배 이상이다. 경덕왕국원소경중원경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940년(태조 23) 충주로 개칭되었다.

[중원경의 치지(治址) 위치]

중원경의 치지(治址)와 관련되는 문헌이나 소경(小京)으로서의 도시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상의 흔적은 전무한 상태다. 단 중원경의 둘레가 2,592보였다는 기록을 갖고 충주관내 주변의 산성들의 둘레를 대조해 보아도 중원경의 크기에 해당하는 성은 없다. 치지의 위치에 대한 견해 중에서 충주시 중앙탑면 장미산성이 위치한 탑평리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 중론이다. 충주시 일대에 분포된 삼국시대의 유적과 출토 유물이 유독 장미산성이 위치한 중앙탑 인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유적과 유물로는, 백제·고구려·신라 모두가 사용된 것으로 보는 충주 장미산성(사적 제400호), 장미산성 입구의 용전리 입석마을에 위치한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중앙탑면 소재의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 충주 누암리 고분군(사적 제463호), 9세기 전반기에 건축된 중앙탑(공식 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중앙탑 주변의 탑평리·용전리·하구암리·장천리 일대에 산재되어 있는 230여 기의 고분 등이 있다.

출토 유물로는,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건흥5년명 금동불광배(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는데, 이 불상은 고구려 장인의 솜씨이거나 그 영향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중앙탑 주변에서 수습된 고구려계 연갈색의 수막새 기와, 중원문화재연구원이 충주시 대소원면 두정리 355번지[대소원면 성종두담길 21] 일대에서 발굴한 5세기 무렵의 고구려계 석실분 6기와 분묘에서 출토된 긴목항아리(장경호), 목짧은항아리(단경호) 등이 있다.

[고구려의 끝내 이루지 못한 국원성 회복]

고구려의 국원성은 신라 영역으로 편입된 후 국원소경·중원소경·중원경으로 개칭되면서 부도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며 중원 문화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신라 또한 국원성을 장악한 기반 위에서 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반면 국원성을 상실한 후 고구려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고구려의 국원성에 대한 애착과 그 회복에 집념은 대단했다.

국원성을 잃은 지 50여 년이 지난 590년 고구려 장군 온달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정할 때 비상한 결의를 다졌다. 온달은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으니 백성들이 통한하고 있습니다…… 계립령(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우리의 것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고 했는데, 이는 남한강 상류에 있는 중원 지역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내용이다.

또한 642년(선덕영왕 11) 백제의 파상적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 신라가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고구려는 “죽령은 본시 우리의 지역이니 네가 만일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보내면 원병을 보내겠다.”고 했을 만큼 고구려로서는 국원성 상실이 뼈아팠고, 그만큼 국원성 회복을 열망했던 것이다.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2월 예성동호회(현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에 의해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예성동호회는 1979년 4월 단국대학교 박물관장 정영호에게 현지 조사를 의뢰하였고, 정영호가 이끄는 학술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한 후 1979년 4월 8일 고구려비로 발표하였다.

충주 고구려비는 높이 144㎝, 폭 55~59㎝, 두께 37㎝ 크기의 화강암 자연석에 기교가 없는 소박한 서체로 음각된 비다. 사면에 글씨를 새긴 사면비로, 앞면은 ‘오월중고려대왕(五月中高麗大王)’으로 시작하며 10행(1행 23자)이고, 좌측면은 7행이고, 우측면은 마모가 심하여 몇 자가 판독될 뿐이고, 후면은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충주 고구려비의 특징은 고구려의 국호를 ‘고려(高麗)’라 칭하고 있고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이며 고구려 남진 정책의 성공을 기리는 척경비라는 것이다.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견이 있으나 장수왕이 충주를 장악하고 국원성을 설치한 후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충주 고구려비를 건립한 목적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판독된 비문의 내용으로 보면, 고구려는 종주국의 위치에서 신라를 동이(東夷)라 칭하고 신라 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르면서 충주까지 온 고구려 태자가 신라 왕을 불러들여 양국이 대대로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맹세하고 신라 왕과 수행원들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등 신라와 친선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우호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신라 입장에서 보면,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시켰을 것이다. 그 사실은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가 점령했던 한강 상류 지역 10군을 점령하고 건립한 단양신라적성비의 비문이 암시해주고 있다. 요컨대 충주 고구려비는 단양신라적성비와 대조를 이루는 비로, 중원 지방을 둘러 싼 삼국간의 패권 쟁탈과 고구려 남진에 따른 중원 지역의 군사적·정치적 상황과 고구려의 판도를 알려주는 유일한 비인 것이다.

[우벌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충주 고구려비에 나오는 우벌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보자. 우벌성의 위치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중원 지방 또는 충주 고구려비의 근방으로 보는 시각이 있을 뿐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필자는 1998년 6월 우벌성의 위치를 장미산성(충주 고구려비)로부터 직경 거리 5.4㎞ 지점에 있는 노은면 연하리보련산성(寶蓮山城)[일명 봉황산성·천룡산성] 일대로 비정한 바 있다.

보련산성은 천혜의 요새지로 장미산성과 마주보는 배후의 성이다. 이곳은 고대 남북 왕래의 길목인 지금의 국도 38호선, 남한강 수로, 충주에서 장호원으로 통하는 지방도 520호선, 노은면 문성리에서 신니면 용원으로 가는 지방도 603호선를 가까이에서 통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 지역을 우벌성으로 보는 이유는 지금의 연하리문성리 사이에 ‘별평(鼈坪)’이라 칭하는 ‘대보들’이 있으며, 문성리에는 우성(于城)이라 칭하는 자연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 주덕읍 덕현리로 넘어가는 ‘우리재’라는 고개가 있다.

특히 우벌(于伐)의 벌은 들판을 뜻하는 것이며, ‘벌평’은 넓은 들판을 뜻한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심증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련산성천룡산성·봉황산성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보련산’은 조선 고종 때의 『여지도서』와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명칭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보련산성의 옛 명칭이 우벌성이 아닌가 싶다.

우성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일부는 보련산성이 위치한 연하리로 편입되고 나머지 일부는 문성리로 편입되었다. 우성리란 지명은 충주 고구려비가 있는 인근이나 충주시 관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보련산성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주위가 무려 1000간의 토성’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붕괴되어 기지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산성의 주변은 태창·대방·돈산광산(현재는 폐광)이 있었고, 주변 지역의 명칭이 큰 바다거북의 등과 같이 넓고 큰 벌판의 뜻을 지닌 ‘별평’, 보련·청룡·봉황성 등의 지명, 노은면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건흥5년명 금동불광배 등을 고려하면 연하리 보련산성 일대는 예로부터 범상치 않았던 지역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입증하는 ‘노은면우성거민김하석단자(老隱面于城居民金夏錫單子)’에도 우성이란 지명이 나온다. 필자는 연하리 일원을 우벌성으로 간주하지만 향후 보련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고모루산성에 관한 비정도 이 산성의 위치에 따라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점령한 시기를 4세기 말 또는 5세기로 보느냐의 의문점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성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5.04.13 항목명 수정 중원고구려비->충주 고구려비(201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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