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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805
한자 -里-
영어의미역 Road as Dolmens Jilmajae Pass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칠선

[개설]

문화란 쉽다고 한다. 그렇지만 쉽다고 해서 누구나 문화를 쉽게 표현할 수는 없다. 여기 우리 삶과 문화와 역사가 함께 종합 선물 세트처럼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곳이 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 문화에서 근대 시문학까지, 하지만 어찌 그것을 눈으로만 볼 수 있겠는가? 가슴으로 귀로 때로는 맛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나보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이 1.6㎞에 걸쳐 약 447기가 분포되어 있으며, 300톤의 한국 최대의 고인돌, 삶과 물소리가 담겨 있는 운곡저수지와 선산김씨와 주자를 배향한 운곡서원(雲谷書院), 서풍에 젖어 가슴 아린 사랑의 주인공인 진채선의 소리를 맛보며, 전쟁터에 나간 임을 그리워 애간장 녹이던 한 여인의 기다림이 동백꽃 되어 눈물질 때, 새 세상을 꿈꾸던 동학군이 찾은 큰 바위 마애불을 품에 안고 천년을 넘게 지켜 오는 보은염 약속의 땅에 국화 향 젖어드는 질마재 고갯길을 넘어 가보자.

[고인돌 질마재 100리 길 안내]

고창군은 2009년에 고인돌 질마재 100리 길을 개발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기존에 개발된 길은 고인돌 질마재 100리 길은 고인돌길, 주진천 복분자길, 질마재길, 보은길 등의 4개 코스로 되어 있다.

고인돌길[8.8㎞, 2시간 30분]은 ① 고창고인돌박물관→ ②고인돌 유적지→ 매산재→ ③ 운곡저수지→ ④동양 최대 고인돌→ ⑤ 고창 용계리 청자요지→ 원평마을 입구로 이어진다. 주진천 복분자길[7.7㎞, 2시간 30분]은 원평마을 입구→ 아산 계산마을→ ① 주진천[인천강]→ ② 덕천사→ ③ 할매바위→ 아산초등학교→ ④ 병바위→ 주진천길[인천강길]→ 호암다리→ 강정다리→ 연기마을 입구로 이어진다. 질마재길[14.5㎞, 5시간]은 연기마을 입구→ ① 고창 분청사기요지→ 산림경영 숲 쉼터→ ② 소요사→ ③ 질마재→ ④ 국화마을→ ⑤ 미당시문학관→ ⑥ 미당생가좌치나루터→ ⑦ 하전갯벌학습체험장→ 소금샘→ 검단소금전시관으로 이어진다. 보은길[12.7㎞, 4시간]은 검단소금전시관→ ① 진채선 생가→ 화산마을→ 연천마을→ ② 참당암→ ③ 도솔암→ ④ 선운사→ 선운산관광안내소 등으로 이어진다.

기존의 고인돌 질마재 100리 길을 적절한 시간과 테마에 따라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도록 ‘고창의 안드로메다은하’, ‘길! 바로 삶의 향기’, ‘짭조름한 맛과 질박한 소리’, ‘천 년 전의 약속’ 등으로 새롭게 정리하고자 한다.

‘고창의 안드로메다은하’길은 ①고인돌박물관→ ②고인돌 유적지→ ③ 매산재→ ④ 운곡저수지→ ⑤동양 최대 고인돌→ ⑥ 고창 용계리 청자요지→ ⑦ 원평마을 입구로 이어진다. ‘길! 바로 삶의 향기’길은 ① 연기마을 입구→ ②분청사기요지→ ③ 산림경영 숲 쉼터→ ④ 소요사→ ⑤ 질마재→ 국화마을→ ⑥ 미당시문학관→ ⑦ 미당생가→ ⑧ 좌치나루터로 이어진다. ‘짭조름한 맛과 질박한 소리’ 길은 ① 하전갯벌학습체험장→ ② 소금샘→ ③ 검단소금전시관→ ④ 진채선 생가로 이어진다. ‘천 년 전의 약속’길은 ① 화산마을→ ② 연천마을→ ③ 참당암→ ④ 도솔암→ ⑤ 선운사→ ⑥ 선운산관광안내소로 이어진다.

이제 그럼, 길을 떠나가보자.

[고창의 안드로메다은하]

안드로메다은하 코스의 답사 순서는 ①고인돌박물관→ ②고인돌 유적지→ ③ 매산재→ ④ 운곡저수지→ ⑤동양 최대 고인돌→ ⑥ 고창 용계리 청자요지→ ⑦ 원평마을 입구 등을 거치게 된다.

“어서 오십시오. 안드로메다 행성에 가시기 위해서 이곳에서 여권을 발급받아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길 가는 나그네의 도보 여행자 여권이다. 여권도 발급 받았으니 슬슬 고인돌 안드로메다를 향해 도보 여행을 해보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군을 우주 은하계의 안드로메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종류, 크기, 형태가 제각각인 데다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행성처럼 점점이 놓인 고인돌군의 모습이 수많은 시간을 초월한 행성들의 우주 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구와 200만 광년이란 거리를 고창 지역의 전체 고인돌 분포 수 약 1,600여기로 표현하고 있다.

은하계를 동경하듯이 한 번쯤 청동기 시대의 문화로 시간 여행을 가보자. 고인돌의 모든 것이 한 곳에 담겨 있는 박물관을 벗어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안드로메다 행성’ 고인돌 군락지로 들어가 보자. ‘왜 여기에 고인돌이 모여 있을까?’,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돌을 가져 왔을까?’라는 궁금증이 더하지만, 고개 돌려 바라보면 수렵 활동을 할 수 있는 너른 들과 고창의 젖줄인 주진천[인천강]이 흐르고, 낮지만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 산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바로 이곳이 채석지가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신성한 장소이다.

행성의 우주 쇼가 끝날 즈음에 코끝을 유혹하는 찔레꽃 달콤한 향에 끌려 발길을 옮긴 곳은 오베이골[일명 오방골]이다. 옛 선인들이 닥나무 등짐을 지고 걷던 매산재 길을 따라 생태 탐방로를 걷다 보면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오색딱따구리, 박새, 곤줄박이, 어치 등이 길 가는 나그네 발길을 즐겁게 한다. 어릴 적 간식거리였던 찔레 순, 봄나물 중 최고의 맛과 향을 자랑하는 달래, 가을이면 푸른 하늘빛 영롱한 용담, 작지만 장구처럼 앙증맞은 열매의 주인공 장구밥나무를 벗 삼아 깊은 숨을 들이킨다. 다리가 아플 때쯤이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인공 습지를 만나게 된다. 부들, 억새, 노랑어리 연꽃들을 보노라면 물속에 비친 또 하나의 얼굴, 바로 나를 돌아볼 수 있어 덤으로 얻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인공 습지를 지나 취한 듯 산길을 돌아가니 운곡저수지가 눈에 보인다. 1981년 운곡저수지가 만들어질 때 150여 가구의 원주민들은 정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곳을 떠나야 했던 아픔이 있는 곳이다. 운곡저수지를 품에 안고 걷노라면 고려 시대 용계리 청자 도요지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흙 좋고 나무 많고 운반하기 편리한 땅, 바로 도요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지닌 안성맞춤이 바로 이곳 고창이다.

멀리 초등학교 때 봄직한 종이 보인다. 바로 ‘소망의 종’이다. 마음 한 구석에 소원 하나 없는 사람 없을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소망의 종을 치면서 내 마음속의 소리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외쳐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겨울에 잠시 쉬어가는 철새들의 편안한 모습들이 물안개처럼 그리워지는 겨울, 눈앞에 떡 버티고 나타나는 300여 톤의 동양 최대의 고인돌이 길 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그 옆의 운곡서원충개공(忠介公) 백암(白巖) 김제(金濟), 충정공(忠貞公) 농암(籠巖) 김주(金澍)[1512~1563], 문강공(文康公)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1389~1456], 문충공(文忠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과 주자를 배향한 선산김씨의 서원으로 1766년 고창 모양 당산에 창건되었다.

1843년 운곡으로 이건하면서 주자 선생을 배향하게 되지만, 조령으로 사우가 훼철되고 강당만 남아 1900년 사우가 복원되었으나 후손은 평소에 간 데 없고 쓸쓸히 서원 앞 느티나무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지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이제는 길 가는 나그네와 막걸리 한 잔 벗할 수도 없으니, 그저 느티나무 정자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사색에 잠겨 잠시 쉬어 가도 좋을 것이다. 어디 청산도의 「진도아리랑」만 소리던가? 물과 벗하고 자연을 벗 삼아 구수한 소리 한판 벌이고 걷다 보면 어느덧 용계리 원평마을에 도착한다.

[길! 바로 삶의 향기]

길! 바로 삶의 향기 코스의 답사 순서는 ① 연기마을 입구→ ②분청사기요지→ ③ 산림경영 숲 쉼터→ ④ 소요사→ ⑤ 질마재→ 국화마을→ ⑥ 미당시문학관→ ⑦ 미당생가→ ⑧ 좌치나루터 등을 거치게 된다.

저만치 멀리 연기사 터가 보인다. 부귀영화는 조선 후기에 모두 사라져 이제는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사에서나 겨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연기사 터를 뒤로 한 채 걷는 길에 운무라도 내려앉는 날이면 바로 선계를 이루는, 작지만 야무져 마치 호랑이 품에 안긴 듯한 소요사에 도착한다. 소요사는 백제 위덕왕 때 소요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도선국사의 사리탑이라고 하는 부도만이 쓸쓸하게 서 있는 곳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귀에 익은 소리 쫓아 질마재길을 오른다. 1975년 『질마재 신화』라는 문집을 발표한 미당. 이제는 신화가 아닌 길이라는 또 다른 현실로 태어났다.

폐교를 활용한 미당시문학관 옆으로 미당이 태어나고 시인의 꿈을 키워온 생가 터가 자리 잡고 있다. 멀리 자리 잡은 묘소는 어린 날을 회상하듯이 국화 그림으로 온통 물들인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코로 느끼는 향이 아닌 가슴으로 향을 담고 다다른 곳은 좌치 나루터이다. 서해안과 만나 생명을 이어주는 탯줄로 자리 잡아 수많은 삶을 이뤄내는 주진천[인천강], 또 하나의 생명 수요 문화의 길이다.

[짭조름한 맛과 질박한 소리]

짭조름한 맛과 질박한 소리 코스의 답사 순서는 ① 하전갯벌학습체험장→ ② 소금샘→ ③ 검단소금전시관→ ④ 진채선 생가 등을 거치게 된다.

‘람사협약’에 등록되고 세계 자연 문화유산에 잠정 목록으로 등록된 곰소만[줄포만]을 손을 잡고 걷다 보면 멀리 곰소만[줄포만]과 내소사를 품은 변산반도가 보인다. 수많은 생명을 잉태한 개펄, 짭조름한 갯냄새만큼 그들의 삶도 힘겨웠을 것이다.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로 인해 먹이 터를 잃은 새들의 낙원이요, 힘겨웠던 삶이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태어난다.

내 자식만큼은 이런 고생 안 시키겠다고 갯일로 구부러진 허리를 펼 때면 아낙네의 귓가에,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경복궁 낙성식에 가서 돌아오지 않던 제자 진채선을 그리워하던 신재효의 애절한 연가가 떠오른다. 조선 후기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 바로 그녀의 생가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녀의 용모는 복원된 생가의 뜰에 핀 흰 해당화처럼 고왔던 모양이다. 어찌 용모만 그랬을까? 소리 또한 해당화 향처럼 톡 쏘는 소리였으니 대원군의 눈에 들지 않았을까?

[천 년 전의 약속]

천 년 전의 약속 코스의 답사 순서는 ① 화산마을→ ② 연천마을→ ③ 참당암→ ④ 도솔암→ ⑤ 선운사→ ⑥ 선운산관광안내소 등을 거치게 된다.

검단포! 바로 약속의 땅을 이룬 곳이다. 백제 위덕왕 때 이곳을 찾은 검단선사는 해적질과 도적질을 일삼는 이곳 백성을 보고 소금 굽는 법과 종이 만드는 법을 전한다. 교화된 도적과 해적들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봄·가을 두 번 산을 넘어 선운사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의 소금을 전하게 되고, 그 약속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사월 초파일 선운사에서는 보은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완주 한지가 유명한 것도 여기서부터 연하지 않았을까? 소금 등짐지고 선운사로 향하던 길 따라 접어드는 곳은 연화마을, 잠시 등짐 내려놓고 쉴만한 느티나무가 길 가는 나그네들을 반긴다.

숨고르기가 끝나면 참회 법회로 유명한 참당암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백제 시대에 대 참회 법회가 열리던 큰 사찰답게 지금은 스님들의 수행 공간인 선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날의 영화를 알려 주듯이 고려 시대의 건축 구조를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한때 천장, 인장, 지장 세 분의 지장보살님들이 계신 곳이기도 하다.

차향 그득한 경내를 벗어나 발길을 돌려 가을 백로 10일 후쯤이면 바로 피안의 세계를 말해 주듯 붉은 꽃무릇 양탄자를 그리며 도솔암으로 향한다. 도솔암 가는 길목에 단아하면서도 당당한 천연기념물 장사송 앞에 다다르면 소나무 넘어 암벽에 작은 굴이 보인다.

신라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 머무르며 기도하던 중, 바위를 깨고 나타나는 미륵을 보고 그 부인과 공주의 이름을 따서 중애암과 도솔암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진흥굴이다. 진흥왕은 무엇을 염원하였을까? 장사송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솔암이 자리한다. 불교 우주관 중 색계의 4번째 공간이 도솔천이다. 바로 미륵의 공간인 도솔천이 눈앞에 펼쳐진다.

도솔암을 지나 몇 발자국 오르다 보면 커다란 마애불이 우리를 내려 보고 있다. 주위에 7그루 소나무가 있어 칠송대라 부르던 이곳은, 지금은 병든 몸으로 남은 한 그루만이 협시불이 되어 마애불을 지키고 있다. 칠송대 마애불, 부처 사후 56억 7천만년 후 새 세상을 꿈꾸며 모든 중생 구제를 염원하던 미륵은 동학 농민 봉기 때 가슴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그런 아픈 가슴 달래 주듯 칠송대 위 내원궁에 자리 잡은 지장보살은 동백꽃만큼이나 뜨거운 미소를 보낸다.

스물스물 계곡을 따라 피어오르는 안개는 「선운사 창건기」의 용들처럼 용문굴을 휘감고, 서해안의 낙조로 비단 베틀을 걸어 놓은 듯한 낙조대로 향한다. 발끝 아스라이 펼쳐진 피안의 세계, 저만치 선운사가 보인다. 「대장금」, 「무인시대」, 「주몽」, 「서동요」 등 수많은 드라마의 무대가 되었던 옛길, 소금 등짐을 지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걷던 약속의 땅 선운사, 헛담의 아름답던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묵직하면서 은은한 차향이 함께 한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만날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선맥을 이룬 백파(白坡) 긍선(亙璇)[1767~1852]과 최고의 강백인 석전(石顚) 영호당(暎湖堂) 박한영(朴漢永)[1870~1948]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최명희(崔明姬)[1947~1998]의 『혼불』에서 이야기 하던 사천왕 발밑의 할머니 눈빛은 “나는 잘못이 많아 이렇게 벌을 받고 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대들은 정말 나보다 청정하다 말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투리 목재를 이용했지만 어느 건물에 뒤지지 않는 선운사 만세루를 돌아 대웅보전 앞에 다다르면 이곳을 지키던 용들은 단청으로 다시 태어나 똬리를 틀고, 벽화 또한 엄숙함을 더해 준다. 산 넘어 부는 해풍은 갈 길을 잃고 이곳에 머무니, 장마철의 습기로 행여 수미산이 무너질까 하여 선운사의 전각은 통풍이 잘 되는 판벽이다.

그러고 보면 선운사 전각들은 모두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송창식의 노랫말보다, 구수한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을 이야기 하던 미당 서정주, 그들은 선운사의 천연기념물 동백 병풍을 보았을 것이다.

문득 백제 가요 중 「선운산가」가 떠오른다. 어찌 동백이 나라의 부름을 받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는 여인의 마음 보다 더 붉다고 할 수 있을까?

‘선운산가비’를 바라보는 마음은 마지막 여정의 끝자락을 잡는다. 긴 여정 피곤했던 발을 계곡에 바람 벗 삼아 담가 본다. 작은 속삭임이 들린다.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바로 송악의 반가운 손짓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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