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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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慶徵 |
영어음역 | Gim Gyeongjing |
이칭/별칭 | 선응(善應),순흥군(順興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선응(善應). 할아버지는 김여물(金汝岉), 아버지는 영의정 김류(金瑬), 어머니는 진주유씨(晋州柳氏)로 유근(柳根)의 딸, 처는 고령박씨(高靈朴氏)로 박효성(朴孝誠)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경징은 1621년(광해군 13)에 치러진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파방(罷榜)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개시(改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 홍문관수찬, 홍문관응교, 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도승지,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어(守禦)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삼고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강화도에 들어갈 때 김경징의 어머니와 아내는 각각 덮개 있는 가마에 태우고 계집종은 모직으로 된 모자를 씌웠으며 짐바리가 50여 바리가 되었다고 한다. 뒤이어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왕실과 전현직 대신인 윤방(尹昉), 김상용(金尙容) 등 많은 사람이 피난하였다.
김경징은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혼자서 강화도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고 명령하였다. 더구나 강화도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군이 쉽게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대비에 소홀하였다. 청군이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 서둘러 방어 계획을 세웠으나 군사가 부족하여 해변의 방어를 포기하였다. 이어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했으나 백성들이 흩어져 성을 지키기가 어렵게 되자 김경징은 나룻배로 피신하고 강화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빈궁 이하 대신 등이 청군에 잡혀 남한산성으로 호송되고, 성이 함락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전 우의정 김상용, 전 판서 이상길(李尙吉) 등은 순국하였으며, 김경징의 서조모 평산신씨(平山申氏), 어머니 진주유씨, 처 고령박씨, 며느리 진주정씨(晋州鄭氏) 등 4대가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강화도 수비의 실책으로 삼사(三司)로부터 탄핵을 받자 임금은 원훈(元勳)의 외아들이라고 하여 특별히 용서하여 강계로 귀양보냈다가 삼사의 탄핵이 워낙 완강하자 소환하여 사사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광덕산(廣德山)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