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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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汝沕 |
영어음역 | Gim Yeomul |
이칭/별칭 | 사수,피구자,외암,장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이며, 호는 피구자(披裘子)·외암(畏庵). 증조부는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지낸 김약균(金若鈞), 할아버지는 목사(牧使) 김수렴(金粹濂)이고, 아버지는 찰방(察訪) 김훈(金壎)이며, 어머니는 신천강씨(信川康氏)로 부사 강의(康顗)의 딸이다. 아들은 영의정 김류(金瑬)이다.
[활동사항]
김여물의 가문은 무신 집안이어서 어려서부터 병서(兵書)와 궁마술(宮馬術)을 익혔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녹봉을 받으면 모두 어머니에게 바치고 한 푼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세 때인 1567년 소과에 합격하고, 1577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문무를 겸하였고, 풍채가 뛰어나 그가 조정에 드나들 때는 모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호조·예조·병조의 좌랑·정랑을 거쳐 충청도사·안동현감·순천부사·담양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 의주목사로 있던 중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감옥에서 풀어주며 자신의 막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일찍이 그의 재능과 용기를 높이 평가한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이 자기의 종사관으로 임명해 줄 것을 간청해 그와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서게 되었다.
신립이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러 왜군의 북상로인 조령(鳥嶺)의 형세를 살필 때, 상주에서 패한 순변사 이일(李鎰)을 만나 조령 방어의 어려움을 알고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김여물은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조령을 점령해 지켜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을 이용해 왜적을 역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충주의 달천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움에 임하게 되었다.
전세는 점점 조선군에게 불리해졌고, 신립이 김여물에게 “그대는 살기를 원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웃으면서 “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며 탄금대 아래에서 왜적 수십 명을 죽이고 함께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김여물은 탄금대전투에서 패할 것을 예견하고 “남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바라는 바이지만,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뜻을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채 한낱 재가 되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나올 뿐이다.”라는 유언을 편지로 아들 김류에게 전하였다. 다음해 그의 의관을 거두어 안산군 동장리[지금의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장사지냈고, 1593년 5월 부인 함양박씨가 강화에서 세상을 떠나자 남편 묘에 부장하였다.
[묘소]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141번지에 있으며, 증정경부인 함양박씨와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옛 비와 새로운 비 2기 및 상석·혼유석이 있고, 좌우에는 동자석·문인석·망주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광해군 초에 충절로 정려(旌閭)되었다. 인조반정 뒤에 정표가 잘못되었다 하여 취소되었다가, 1639년에 그의 아들 김류의 청에 의해 다시 정표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788년에는 장의(壯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832년에 순조(純祖)는 임진왜란 240주년을 맞아 당시 신립·김여물 등이 순절한 충주 달천 터에 제사를 지내 그들의 충정을 기리도록 하였다.
1991년 김여물의 묘와 신도비가 안산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는데, 신도비의 비문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글씨는 도승지 김좌명(金佐明)이 썼으며, 한성부우윤 이정영(李正英)이 전(篆)하였다. 그의 묘역 앞에 세워진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번지]은 그의 충신 정려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그의 후실 평산신씨를 비롯하여 아들 김류의 부인 진주유씨, 손자 김경징의 부인 고령박씨, 증손 김진표의 부인 진주정씨의 열녀 정려가 함께 모셔져 있으며, 1983년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