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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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梅窓詩碑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성터길 20|매창로 8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형미 |
[정의]
부안 출신의 조선 중기 여류 시인 이매창을 기리기 위하여 부안 지역에 세운 시비.
[건립 경위]
사람들에게 성황산으로 더 많이 알려진 부안 성소산, 서림 공원으로도 불리는 이 산의 입구에 서어나무로 둘러싸인 아담한 정자 서림정(西林亭)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높여 있는 금대(琴臺) 아래쪽에 이매창의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부안’ 하면 떠오르는 조선 시대 명기(名技)이자 여류 시인이었던 이매창. 본명은 향금(香今)이고, 자(字)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 또는 계생(桂生)이라고도 했다. 1974년 4월 27일, 매창기념사업회에서는 부안에 예향을 전한 이매창을 기려 금대 아래쪽 약수터 곁에 시비 1기를 세웠다. 이매창의 시조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를 새긴 이매창 최초의 시비인 것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離別)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규장각본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있는 매창의 절창 ‘이화우(梨花雨)’. 이 시비가 세워지고 나서 24년 후인 1997년 7월 1일, 100m쯤 떨어진 곳 등성이 마루 옛 망해루가 있던 동편 너럭바위께에 또 1기의 시비가 세워졌다. 당시 강수원 군수 시절에 서림 공원 재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부안군에서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매창의 시라 하여 「백운사(白雲寺)」라는 시를 새긴 이 시비는 많은 논란과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매창의 시가 아닌 것을 그의 시로 오인하여 세웠다는 것이다. 하여 부안 향토학자인 김형주가 여러 차례 철거 또는 개비(改碑)를 건의하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결국 「백운사」 시비는 논증된 바도 없는 작자 미상의 떠돌이 유전시(流轉詩)를 이매창의 명시(名詩)로 격상시켜 시비에까지 새겨 공원에 세웠다는 데에 사람들의 분노를 크게 사 비난까지 받기에 이르렀다.1974년 맨 처음 세운 시비 양옆 모서리에도 당시에 이매창의 대표적인 한시 「증취객(贈取客)」과 함께 「백운사」 시를 새겨 논란이 있었던 터였다. 더군다나 한 사람의 시비를 동일한 장소에 두 개를 세우는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 하여 더더욱 군더더기가 되었다고 꼬집었다. 이후 「백운사」는 평양 기생의 시로 밝혀졌지만, 2020년 현재까지도 시비는 고쳐진 바 없이 그대로 놓여 있는 상황이다.
2001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매창 공원이 조성되었다. 2010년 이 곳에도 이매창의 시비가 세워졌다. 이매창의 시 「병중(病中)」이 특이하게도 한자와 한글로 함께 새겨진 시비였다. 「병중」은 임진왜란 직후 이매창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유희경(劉希慶)[1545~1636]을 그리워하며 쓴 한시로, 이매창 사후 발간된 시집 『매창집(梅窓集)』에 수록되어 있다.
매창 공원에는 이외에도 「이화우 흩날릴 제」를 비롯하여 「옛 님을 생각하며」, 「어수대」 등 10여 점의 시를 한글 또는 한자 시비로 세워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감상하도록 하고 있다. 도심 속 친근한 공원이라 부안 군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매창 공원에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된 이매창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매창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나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하여 시조와 창을 하는 모임인 부풍율회(扶風律會)에서 해마다 음력 4월 5일이면 이매창 묘 앞에 모여 매창 문화제를 지내고 있다. 이매창 묘비는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세운 것인데, 묘지 관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마을의 나무꾼들이 벌초를 하며 무덤을 돌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 뜻 깊은 곳이기에 이매창의 시비가 있는 공원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위치]
서림 공원에 세워진 이매창의 시비 중 하나는 서림 공원 입구 금대와 혜천(惠泉)이라는 옛 우물 옆에 세워져 있다. 이매창의 무덤이 있다 하여 ‘매창이뜸’ 혹은 ‘매창뜸’으로 불리는 공동 묘역을 정비하여 만든 매창 공원에도 이매창의 시비가 여러 기 세워져 있다.
[형태]
부안에 세워진 매창의 시비로는 성소산 서림 공원 입구에 세워진 것이 최초의 것이라 한다. 그 형태가 간결하면서도 무게감이 있어 가무와 현금(弦琴) 연주 등 다재다능한 예술인으로서의 이매창의 자존감을 돋보이게 해준다. 매창뜸 즉 지금의 매창 공원에 세워진 매창의 여러 시비들은 서림 공원에서 보이는 시비와는 또 다른 멋이 있다. 요즘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한글로 쓴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한문으로 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한글로 되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이매창의 시를 쉽게 읊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시비의 형태 또한 여타 비와 달리 각을 두지 않고 자연석을 세워 놓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다.
[의의와 평가]
한시뿐만 아니라 현금과 가무가 빼어나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긴 이매창. 부안 현리 이탕종의 딸로 태어나 불과 38세로 불우한 생을 마친 부안의 명기지만, 개성과 주체적 삶을 구가했던 그녀의 예술혼과 문학적 성과는 조선 시조 4,000여 수 가운데에서도 빼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미천한 기생이지만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으며, 당대 뛰어난 시인 묵객들과 함께 하였고, 허균(許筠), 이귀(李貴) 등과의 사귐이 있었지만, 촌은 유희경만을 사랑하면서 수절한 매창. 오늘날 전해지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겨 시비에 새겨진 시들만으로도 조선조 기녀 문학의 일면을 접할 수 있기에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당대 문학사적 의의와 함께 예향의 고장 부안의 문향에 한껏 취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