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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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南山城 |
영어의미역 | Chungju Mountain Fortress |
이칭/별칭 | 동악성,충주산성,금봉산성,마고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산 24-1|안림동 산 56-1|목벌동 산 54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백종오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0년 1월 9일 - 충주 남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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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충주 남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성곽 |
양식 | 석성 |
건립시기/연도 | 고대 |
높이 | 7~8m |
길이 | 1,120m |
둘레 | 1,120m |
면적 | 성 내부 면적 46,524㎡|지정면적 1,165㎡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산 24-1 |안림동 산 56-1|목벌동 산 54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북도 기념물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목벌동과 안림동의 경계인 남산 정상부에 축조된 고대 산성.
[개설]
충주 남산성은 해발 636m의 남산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두 개의 계곡 상단을 에워싼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축 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동악성(桐岳城)’으로 추정된다.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충주 남산성은 동악성(桐岳城, 凍嶽城)·충주산성(忠州山城)·금봉산성(錦鳳山城)·마고성(麻姑城) 등으로도 불린다.
[건립경위]
충주 남산성의 축성과 관련해서는 삼한시대에 마고선녀(麻姑仙女)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는 설과 보은 삼년산성 등에서도 확인되는 남매축성설 등이 전하고 있다. 마고선녀의 축성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금단산 수정봉에 은거하던 마귀할미가 하늘의 계율을 어기고 마구 살상을 하여 천제의 노여움을 사 하천산 누독복으로 쫓겨나 험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후 500년이 지난 후 마귀할미가 개과천선하는 기미가 보이자 천제께서 금봉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살라고 하면서 북두칠성을 따라 7일 이내에 축성하도록 했다는 전설이다.
한편, 『조선약사(朝鮮略史)』에는 백제 구이신왕 때에 쌓고 475(개로왕 21)에 보수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개로왕이 충주 안림동 일대에 도읍을 옮기려 했다는 전설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 김윤후(金允候)가 주민과 함께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낸 충주 남산성 전투 기록과 맞물려 역사의 현장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동안의 조사 결과를 참고하면 신라 국원소경(國原小京)의 설치와 관련하여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고, 주로 사용한 시기도 신라시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충주 남산성이 있는 남산(금봉산)은 지세가 험하고 가파른 요새로 북쪽으로 해발 774m의 계명산(鷄鳴山)을 마주하고 있으며, 두 산 사이는 옛 지리지에 심항현(心項峴)으로 기록된 마스목재 혹은 마즈막재(마지막재)라고 부르는 교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충주 분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북쪽은 한강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물길을 막는 영액(嶺阨)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멀리 청풍 방면, 남쪽으로는 월악산과 계립령 방면에서 오는 재오개, 서남쪽으로는 조령과 이화령을 넘어 북상하는 노루목과 대림산성, 서쪽으로는 멀리 음성 방면과 망이산성, 서북쪽으로는 충주시내와 탄금대, 장미산성 등이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형태]
충주 남산성은 평면의 굴곡이 심한 부정형으로 테뫼식과 포곡식의 중간적인 형태로 동향으로 면을 열고 중앙에 능선을 포함하고 있다. 산의 지세에 따라 성의 긴 지름이 남북 방향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서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면적을 수용하였고, 서쪽 성벽은 산중턱 부분을 통과하고 있다. 계곡부를 향하고 있는 동문을 제외하면 계곡이 서로 엇갈리는 능선의 꼭대기에 문을 배치하였다. 서쪽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며 2개의 깊은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곳에는 특이한 형태의 저수조와 수구문을 축조하였다.
[현황]
충주 남산성은 1984년 충주공업전문대학(현 충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성벽의 윤곽 측량과 내부 시설 등에 대한 대략적인 사항이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 결과 성벽은 둘레 1,120m, 높이 7~8m로 동문지를 비롯한 북문지, 서문지, 남문지 등 4개소의 문지와 동문지 남쪽의 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길이 60~75㎝, 두께 15~20㎝가량의 자연할석을 사용하여 쌓았다.
면석을 가공하였으며, 흙과 모래를 사용하지 않고 폭 4~5m로 높이 5.5~6m가량 쌓았는데 한 단은 가로로 쌓고, 한 단은 세로쌓기 하여 ‘정(井)’자 모양을 하고 있다. 성벽의 상단이 하단보다 10°가량 안으로 기울어 있다. 산능선을 가로지르는 구간은 외측에 기단부를 따로 두지 않고 자연암반 위에 직접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내면에 협축하였다.
계곡부에 해당하는 동벽 구간은 성내 쪽으로 현저하게 내만하여 축조하였는데, 이는 성내에서 성의 바깥으로 향하는 토압과 수압을 견디도록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곡부는 외측에 3.8m 이상의 기단 석축을 만들고 이 석축 위에서 1m 이상 성내측으로 물려서 성벽을 구축하였는데, 성벽 중간 지점부터 내외협축하였다.
문지는 모두 4개소가 발견되었는데 동문을 제외하고 북문지는 북쪽 회절부, 남문지는 남쪽 회절부, 서문지는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거식에 가까운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한편 동문지는 계곡 방향에 있어 성벽의 바깥에서 4m 이상 성벽 위에 문이 시설된 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986년에는 동벽 구간의 3개 지점에 대한 조사를 통해 성벽 잔존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성벽은 내외협축(內外夾築)되었으며 성벽 상면의 외연(外緣)을 따라 작은 할석으로 축조된 너비 1.1m, 높이 0.7m가량의 평여장(平女墻)이 미석(楣石) 없이 시설되었음이 조사되었다. 또한 성내에는 성벽 안쪽을 따라 일정한 깊이에 빗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하는 배수로가 마련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계곡부를 통과하는 성벽에는 체성(體城)의 외측 하단에 별도의 기단 보축(補築)을 마련하고 있어 신라의 석축성벽임이 확인되었다.
1993년 수구의 유실 위기에 따라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출수구(出水口)의 안쪽에 배수구로 유입되는 입수구가 발견되어 신라 산성의 가장 전형적인 성벽통과형 수구가 밝혀졌다. 또 물이 수구로 한꺼번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과 도수로(導水路)의 일부, 숯가마도 확인되었다. 특히 동문지 남측 측벽 조사에서 문의 개구부 안쪽으로 반원형의 방벽(防壁) 시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1998년 동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문의 개구부의 안쪽에 반원형의 방벽을 가지고 있어 성벽과 성내에서 1차로 사다리 식의 계단을 별도로 이용하여 문구(門口)로 내려가고 다시 문구에서 성 밖으로 사다리를 이용하여 출입이 가능한 형태의 전형적인 현문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또한 적은 양의 물이 빠지는 배수로를 개구부에 만들어 방벽으로 차단된 물이 집수지에 모여 성문을 따라 배수되도록 고안한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 배수로는 3차례에 걸쳐 변화하고 있어 점차 문의 개구부 바닥이 높아졌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동문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6세기 중엽이후의 신라 유물로 확인됨으로써 신라 국원소경의 설치와 관련되어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2~2003년에 걸쳐 이루어진 동문지 남측 집수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둥근 모양의 석축 호안 하부로 방형 혹은 오각형의 석축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 시설은 당초 1, 2차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조사 결과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바닥을 마름모꼴로 만든 특이한 형태로, 아래쪽을 사다리꼴로 만든 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으며 계곡부에 해당하는 남서모서리는 후대에 석축하여 보강하였다. 이곳에서 마구류와 토기, 기와, 목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충주 남산성에 출토된 토기류는 문양과 형식상 인근의 충주 누암리 고분군과 황룡사 1차 가람 및 2차 가람 기반 다짐토 내에서 출토된 토기, 안압지에서 출토 토기와 견주어 볼 수 있으며, 시기는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에 이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와류는 대부분 선조문 계열로 모골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단양의 적성, 온달산성과 청주의 부모산성, 보은 매곡산성 등에서 출토되는 기와와 비교된다.
[의의와 평가]
충주 남산성은 신라의 전형적인 축성기법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유물만이 출토되고 있어 신라의 국원소경 설치라는 당시 역사를 확인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충주산성에서 확인된 동문지는 개구부의 안쪽에 반원형의 방벽을 갖춘 구조로 성벽과 성내에서 1차로 별도의 계단을 이용하여 문구로 내려가고, 다시 문구의 바닥에서 성 밖으로 사다리를 이용해야 출입이 가능할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현문의 구조인 문구의 개구부에 문짝을 달아 세운 문비(門扉)를 갖춘 형태와 다른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 계곡의 남북으로 자리한 동문지의 집수시설 및 배수장치와 저수지는 계곡의 물을 배수하는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성내의 복잡한 지형과 수압, 토압 등 여건을 최대한 고려한 시설로서 당시 축성술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