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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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大林山城 |
영어의미역 | Daerimsan Mountain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산 45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백종오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9년 12월 31일 - 충주 대림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제11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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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충주 대림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성곽 |
양식 | 토석혼축성 |
건립시기/연도 | 고려시대 |
둘레 | 4,906m |
면적 | 871,719㎡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산 45 |
소유자 | 국유|공유|개인소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북도 기념물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산성.
[개설]
충주 대림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과 살미면 향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대림산[487.5m]의 정상부를 포함하는 능선과 계곡부를 가로지르며 축조된 둘레 4,906m의 토석혼축 포곡식 산성으로, 고려 1253년(고종 40) 몽고의 침략에서 최대의 승전을 거둔 충주 남산성 전투의 현장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당시 충주 일대에 진출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몽고군은 여주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금당협(金堂峽)에서 고려군 충주창정(忠州倉正) 최수(崔守)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최수는 몽고군 15명의 목을 베고 200여 명의 포로를 석방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주 북쪽 10여 리까지 퇴각한 몽고군은 사령관 야굴(也窟)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충주성을 포위 공략한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70일간 항전하며 승리를 거둠으로써 몽고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당시 충주방호별감으로 충주산성을 지키던 김윤후(金允侯)는 몽고군이 포위한 지 70일이 되어 양식이 거의 소진될 때쯤 사졸(士卒)을 독려하면서 관노(官奴)의 적(籍)을 꺼내어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충주산성 전투 현장을 충주 대림산성으로 비정하는 이유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기록에 충주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그려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림산이 충주의 진산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충주 대림산성은 충주의 치소와 가까우며, 4㎞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성으로서 70일이라는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 즉 많은 양곡을 비축하고 다수의 인마가 체류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산성내 정상부 가까이에 ‘종주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서 종주는 바로 당시 고려군을 지휘한 우종주(于宗柱)로 지칭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건립경위]
충주 대림산성의 축성과 관련하여 문화재관리국에서 간행한 『문화유적총람』(상)에는 “삼국시대 축조된 성으로 ……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에도 사용되었다. …… 성내에서 삼국시대의 와편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여 삼국시대 성곽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후 충청북도 『문화재지』, 『한국의 성곽과 봉수』(상) 등의 기록에는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쌓아져서 몇 차례 주인이 바뀐 성으로 후에는 봉수대를 겸했으며 조선시대 충주 지역이 전략적 요충지로 중시되자 몇 차례 보수하여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정밀 지표조사 결과 몇 가지 측면에서 삼국시대 축성이 아닐 수 있음이 제시되었다. 먼저 축성 방법적인 측면에서 삼국시대 산성들이 대부분 석축성인 데 비해 충주 대림산성의 경우 토석혼축이고, 성벽의 축조에 있어서도 정연하지 못하고 조잡하다는 점 등에서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이다. 또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도 기존에 언급되었던 백제 토기편 등의 삼국시대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소량의 인화문토기 외에 대부분 고려시대의 유물이 집중되는 점 등에서도 축성 시기를 삼국시대로 올려보기가 힘들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축조 방법이나 출토유물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충주 대림산성은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스런 정치상황 속에서 지방정부나 호족세력에 의해 축성되었음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축성되어 조선시대에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충주 대림산성은 지정학적으로 충주시내 남쪽의 국도 3호선 변에 자리하고 있어 남쪽으로부터 충주로 진입하거나 충주를 공략한 적이 남하하는 길목을 공제하는 데 있어서 두루 유리한 요충지에 해당한다. 즉, 이화령이나 조령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충주 지역 방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쪽으로 해발 100m가 넘는 절벽이 형성되어 있는 등 동서남북의 경사가 급하고 능선의 종주 방향이 월악산에서 뻗어 내려온 방향성을 유지하여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 남-북 방향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 또는 방어하기에도 매우 유리한 입지여건을 갖춘 천험의 요새이다.
주변의 관방 유적을 살펴보면 북쪽으로 충주읍성과 대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3.4㎞ 거리에 충주 남산성, 5.6㎞ 거리에 충주영액이 자리하고 있다. 서쪽에는 용관동산성, 서남쪽으로 5.4㎞ 지점에 문주리 산성이 있다. 대림산 봉수를 중심으로 하면 남쪽으로 8.6㎞ 떨어져 충주 주정산 봉수가, 서쪽으로 11.4㎞ 거리에 마산봉수가 자리하고 있다.
[형태]
충주 대림산성은 해발 487.5m인 봉수대가 있는 봉우리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길쭉하고 서쪽이 좁은 삼태기 모양으로 부정형의 장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둘레는 4,906m로 성벽의 높이는 4~6m 이며 치성과 망루, 장대 등을 설치하였던 건물지가 남아 있다. 또한 성벽의 안쪽에는 4~5m 너비의 회곽도가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가장 낮은 곳의 해발이 100m 정도로 가장 높은 곳에 해당하는 봉수대(487.5m)와의 비고가 387.5m에 이를 정도로 성 내부와 성벽의 높이차가 크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 내부에서 성벽이 있는 곳까지의 경사가 30°에 이를 정도로 매우 심한 편이어서, 성의 규모와 면적에 비해 성내에서 활용가능한 공간은 전체 면적의 20% 정도로 그리 넉넉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현황]
1. 성벽과 시설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충주목 고적조에 따르면 충주 대림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638척이고 안에 우물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당시 사용된 포백척(布帛尺, 1척=46.7㎝)으로 환산하면 성의 둘레는 4,500m 가량이 된다. 하지만 성벽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 결과 전체 둘레는 4,906m에 달한다.
성벽은 동벽이 585m, 서벽 538m, 남벽 1,555m, 북벽 2,228m로 성의 장축 방향인 동-서 길이가 1,227m, 남-북 길이가 782.6m이다. 산성의 형태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의 형태이므로, 성벽의 비고 차가 심해 외부에서 내부의 조망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가장 낮은 서문지 일대에는 방어력을 높이고, 외부에서의 조망을 차단하기 위해 치성과 함께 서쪽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리고 성벽 안쪽에 보조성벽을 쌓기도 하였다. 해발 100m 지점에 위치한 서문지는 계곡의 가장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데, 석축 부분을 보면 하단부에 길이 140×50㎝, 150×60㎝ 크기의 대형 괴석을 놓았다.
그 위에 50×20㎝ 크기의 할석을 쌓고 성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웠다. 서문지로 이어지는 성벽은 10° 정도의 완만한 경사로 높이 4m, 폭 4m 정도로 석축을 하고 그 안쪽에 성벽의 윗면과 같은 높이로 흙과 잡석 채움을 하였다. 성벽 외면의 기울기가 70°로 급경사를 이루도록 하였다. 또한 서문지에서 북서 방향의 해발 115m 지점에는 서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 또는 치성의 형태로 서쪽 계곡을 통하여 성내로 진입하는 적을 측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벽은 대부분 내탁의 형태로 축성하였는데, 능선으로 올라가는 지점인 남벽과 서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의 기단부만 석축하고 나머지 부분은 토축한 토석혼축 성벽이다. 석축은 네모막돌 바른층 쌓기를 하여 표면을 다듬은 30~40㎝ 크기의 장방형 성돌을 암반 위에 올리고 뒤채움 돌을 다져 넣어 가로줄눈이 거의 수평을 이루도록 하였다.
각 층은 1/3 정도가 맞물리도록 한 ‘신(臣)’ 자형으로 쌓았고, 퇴물림쌓기도 하였으나 성돌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바른층 쌓기를 하지 않아 성벽의 안정성에 문제가 확인되기도 한다. 또한 토석혼축 부분에도 성벽의 기단부만 석축을 하고 토축 부분의 경우 판축 흔적이 보이지 않고 삭토를 통해 생긴 흙을 할석과 함께 막다짐으로 다져놓아 조잡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충주 대림산성 내의 시설물로는 동서남북의 4개 문지 이외에 여러 개의 암문터와 치성, 장대지와 각루지, 창고지 등 많은 건물지와 우물지가 확인된다. 이들 건물지는 현재 성내에 전하는 창터밭·절터밭·대궐밭 등의 지명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봉수
산성의 가장 높은 정상부에 자리한 봉수는 계립령을 넘어오는 마골점봉수와 연결되는 연풍 충주 주정산 봉수와 마산봉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북동쪽의 충주 남산성을 비롯 동서남북의 조망이 매우 양호하다. 봉수에 대해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원형(圓形)의 석루(石壘) 2단(段)’이라 하였고, 『전국유적목록』에는 ‘원형의 석루 2단, 높이 30척’으로 기록하였다. 현재 봉수대는 대지를 삭토한 후 둘레를 보축하였는데 형태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장축이 20m 가량 된다.
3. 유물
충주 대림산성 내에서는 전역에 걸쳐 많은 양의 유물이 산포하고 있다. 『문화유적총람』에 삼국시대의 와편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였고, 『문화재지』에도 신라계 및 백제계의 토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정밀지표조사(1997)에서는 삼국시대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만 확인되었다.
기와류는 선조문·무문·어골문·복합문·격자문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기와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중에서 돌출된 선으로 주연부를 표시하고, 연주문이 없는 형태의 당초문 암막새는 고려시대의 유물로 생각된다. 토기류는 고려시대의 호형토기조각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소성 상태가 매우 조잡한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토기조각도 확인되었다.
성내 건물지에서는 병과 접시·소호·매병 등 다양한 종류의 고려청자조각이 채집되는데, 상감·음각·양각 등 기법 또한 다양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소상 상태와 발색이 양호한 고급 청자류가 많이 확인되어 산성의 중심 연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청화백자조각도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봉수대 부근에서는 기와조각과 조선시대 도기조각, 백자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주 대림산성은 삼국시대의 성, 또는 대몽항쟁을 치른 충주산성으로 비정되기도 하지만 발굴조사 등 산성의 축성과 관련한 정확한 자료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충주 대림산성은 충주 일원의 산성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으로 축성 방법에서도 토석혼축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연지형을 따라 치성을 길게 축조하였는데 수백m에 달하는 규모의 치성도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 산성의 형태와 축성방법 등을 고려해보면 충주 대림산성은 평시에 병력이 상주하였다기보다는 성내 창고 등에 군량미나 병장기 등을 보관하였다가 유사시에 군관민이 함께 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였던 곳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이해된다.
1999년 12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