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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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悼墓地傳說 |
영어의미역 | Legend of Yi Do's Graveyard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 |
집필자 | 이은칠 |
성격 | 유래담|지명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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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이도|노승 |
관련지명 | 이도산 |
모티프 유형 | 효자에게 명당자리 잡아준 노승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에서 이도 묘지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62년 10월 5일 공주시 중학동에서 임헌도 교수가 채록하여 『한국전설대관』(정연사, 1973)에 수록하였다. 제보자는 박윤교(남)이다.
[내용]
공주시 신관동 시목에서 월송동으로 가는 길가에 이도산(李棹山)이 있다. 그 산위에 전의이씨(全義李氏) 시조인 이도(李棹)의 묘가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1,000여 년 전인 고려 초에 이도산 밑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무척 가난하였다. 이도와 그의 조상은 일찍이 금강 곰나룻터에서 뱃사공을 업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이도는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로 넘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공주 일대 굶주린 사람들은 그들을 부모처럼 의지하며 따랐다. 당시에는 걸식을 하고 다니는 거지들이 득실거리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후삼국이 분열된 채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였으므로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초근목피로 연명할 만큼 가난에 찌들어 있었으므로 이도의 구휼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대체로 뱃사공은 숱한 사람을 대하는 직업적 특성상 인정이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이도는 마음이 넓고 따뜻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뱃사공으로 구슬땀을 흘리던 이도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인연이 찾아왔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나루터를 찾아와 이도에게 금강 건너편에 가야 할 바쁜 일이 있으니 독선(혼자 타는 배)으로 건너주기를 청했다. 그런데 나룻배가 강을 건너 강변 언덕에 닿자 스님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오던 길로 가야 되니 내쳐 다시 건너달라.”고 말했다. 이도는 그냥 웃으면서 아무런 불평 없이 건네주자, 스님은 또다시 건너편으로 가기를 요구했다.
보통의 뱃사공 같았으면 불평이 쏟아졌겠지만 이도는 이내 스님의 주문에 선선히 응했다. 이런 이도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던 스님이 내가 아는 것은 없으나 힘이 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이도는 부친상을 당한 지가 1년이 지났는데 장지를 구하지 못해 가매장을 하고 있는 것이 자식 된 도리로 마음에 걸린다고 하였다.
스님은 뒷산에 올라 묘지를 잡아주며 이곳이 명당인데, 훗날 누군가 와서 그 산소자리가 흉지라며 이장해야 할 것이라고 유혹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반드시 백회 100포를 부어 다져 봉분을 짓고 ‘南來妖師 朴相來 單知一色未知 萬代榮華之地(남쪽에서 요사스런 지관 박상래가 찾아와 이곳이 좋지 않은 묘터이니 이장할 것을 권할 것인 즉 그의 말을 듣지 않아야 만대의 영화가 이어진다)’란 글을 돌에 새겨 묘 속에 묻으라고 일러주었다. 여러 대 뒤에 스님의 말대로 박상래의 유혹이 있었으나 묘에서 나온 글을 보고 이장을 중지하여 오늘날까지 전의이씨 자손은 번성한 것이라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이도묘지 전설」은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효자에게 원조자가 명당자리를 알려 주어 집안을 벙창하게 한다는 일반적인 모티프 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