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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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說話 |
영어의미역 | Folk Ta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집필자 | 구중회 |
[정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는 민담·전설·신화의 총칭.
[개설]
공주 지역 설화를 살펴보면 신화는 거의 없고 전설과 민담이 전승되고 있는데, 이도 백제사 및 계룡산과 관련이 깊다. 또한 공주가 한양과 가까운 관계로 정치사와 관련된 설화가 적지 않은데, 예를 들면 이괄의 난으로 인한 인조의 공주 파천 등이 그것이다. 1992년에 구중회가 『공주민속』에서 설화를 정리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전설이 46편이고, 민담이 40편이나 된다. 한 자료로 공주 지역의 설화를 설명하는 이유는 이 자료가 그간 발간된 문헌 설화를 총정리했기 때문이다.
[전설의 채록]
전설의 경우는 『삼국유사』에 실린 1종, 1965년에 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충청남도지』에서 7종, 1973년에 임헌도가 지은 『한국전설대관(韓國傳說大觀)』에 실린 59종 등이 그 대상이다. 이후에 많은 공주의 전설을 소개하고 있으나 거의 이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뒤 1981년에 최문휘가 집필한 『공주의 산하』에서 30여 종을 보강했으나 현장성이 떨어져 평가하기가 어렵다. 이후 몇 사람이 더 참여했으나 별로 채록하지 못했다.
그 자료로는 1) 수원사(水源寺)의 미륵선화 미시랑(未尸郞), 2) 웅천(熊川), 3) 계룡산, 4) 용지(龍池), 5) 장군바위, 6) 동혈사(銅穴寺)의 쌀 나오는 구멍, 7) 우성면 내산리 노루목, 8) 남매탑(오뉘탑), 9) 연미산 지네, 10) 이도(李棹) 묘지의 유래, 11) 정안면 보물리 정자나무, 12) 신라 효자 상덕(向德), 13) 이복(李福), 14) 장자못(우성면 옥성리), 15) 쇠뿔둠벙(신평리 대룡리), 16) 인불구(人不救)의 내력, 17) 말티고개, 18) 기녀 능화(綾花)의 충성, 19) 영규(靈圭) 대사, 20) 조왕동(助王洞)의 유래, 21) 고마니 고개, 22) 우금(牛禁)고개, 23) 유구(維鳩)의 명칭, 24) 엄대암(嚴大巖), 25) 박문수의 일화, 26) 거북의 애화, 27) 개바위, 28) 도루메기의 어원, 29) 구리내의 연유, 30) 서고청(徐孤靑) 선생, 31) 대통사(大通寺)의 연기(緣起), 32) 영은사(靈隱寺)의 일화, 33) 공우탑(功牛塔), 34) 이인 돌무거리, 35) 팽나무 세 개의 묘, 36) 축성 이야기, 37) 화헌리의 성당, 38) 백인걸과 기묘사화, 39) 공주 지방의 농부가 유래, 40) 달래라보지고개, 41) 한다리, 42) 하마루, 43) 박문수와 추녀, 44) 농바위(계룡면 중장리), 45) 절손명당, 46) 천태산의 마고선녀 등이 있다.
[민담의 채록]
민담의 경우는 1984년에 박계홍·황인덕이 펴낸 『한국구비문화대계-충청남도 공주편-』이 거의 유일하다. 그런데 이 민담 자료는 유구읍(당시는 면, 30종, 이 숫자는 설화로 뭉뚱거려진 결과로 이하 모두 같음), 반포면 19종, 의당면 33종, 사곡면 20종, 우성면 21종, 이인면 26종 등 6개 지역만 다루고 있어 공주 전체의 자료로 보기는 어렵다.
이후 1987년에 한상수가 집필한 『충남의 구비전승』에서는 계룡면 4종, 신풍면 4종, 반포면 3종, 장기면 4종, 탄천면 2종, 정안면 1종, 의당면 1종, 우성면 2종 등이 채록되었다. 1992년 임석재가 펴낸 『한국구전설화』에서는 15종이, 1992년 구중회가 집필한 『공주민속』에서는 9종이 새로 채록되었다. 이후 별다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집중적인 채록이 요청된다.
그 자료로는 1) 인업(人業), 2) 시조에 미친 사람, 3) 담배의 유래, 4) 쥐좇도 모른다, 5) 시집살이 이야기, 6) 가장 짧은 얘기, 7) 가장 긴 이야기, 8) 제석님네 맏딸 얘기, 9) 호적적(籍)자 연서, 10) 용한 점쟁이, 11) 아우 흉내 내려다 망신당한 형, 12) 하늘이 내려준 홍시, 13) 두 사돈의 허풍담, 14) 집만 바꿔 앉은 이사, 15) 신단지 둘러 엎은 며느리, 16) 사냥꾼 형제, 17) 소담(笑談) 두 마디, 18) 백로가 고친 병, 19) 도라지꽃, 20) 모기가 된 형수, 21) 이상한 남비, 22) 제일 훌륭한 사위, 23) 지성이면 감천, 24) 아버지 유물, 25) 나뭇잎, 26) 나무꾼과 소년, 27) 추잎 꽃나물, 28) 팔난시(八難詩), 29) 샛서방질하는 구렁이, 30) 매미, 31) 뻐국대가리, 32) 새끼 새발, 33) 꼬마 신랑 구해 주고 부자된 이야기, 34) 진짜 친구 이야기, 35) 수수경단, 36) 도깨비가 사라진 이유, 37) 심술부린 호랑이 얘기, 38) 도깨비 이야기, 39) 귀신이 예언한 윤병사의 이야기, 40) 기회가 왔을 때 잡아라 등이 있다.
[고마나루 설화]
지금까지 ‘공주’의 지명에 대한 어원은 ‘고마나루’에서 온 말이다. 즉 ‘고마나루’는 ‘고마’+‘나루’의 결합으로 ‘고마’는 ‘곰’, ‘나루’는 ‘진(津)’ 즉 웅진(熊津)으로 풀이한 것이다. 그래서 ‘곰나루’라는 지명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고마’를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여튼 고마나루 설화가 공주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고마나루 전설이 문헌설화 ‘웅진(熊津)’으로 정착한 것은 1935년 11월 11일에 간행된 『충남향토지(忠南鄕土誌)』에서 비롯한다. 채록자는 이웅(李熊)과 이종빈(李鐘彬)이었다. 후자는 ‘전설 편’을, 전자는 ‘고적 편’을 각각 채록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자.
“인간을 사모한 암콤은 나무꾼(혹은 심마니)을 납치하여 같이 살았다. 나무꾼이 도망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냥을 갈 때마다 바위로 문을 막았다. 세월이 흘러 자녀가 둘(혹은 셋)이나 생기자, 암콤은 안심하고 동굴 문을 막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를 틈타 나무꾼은 도망갈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암콤은 금강을 건너간 남편에게 돌아오라고 하소연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이런 줄거리가 이종빈이 채록한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가 점점 퍼져 백제시대 왕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이에 왕이 감찰사(도지사)에게 주외면(州外面) 용당리(龍堂里)라는 연미산 맞은 편 마을에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소나무가 많은 작은 산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한 해에 여러 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 뒤로 배가 뒤집혀 사람이 죽는 사고가 없어졌다. 이런 연유로 이를 웅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웅이 채록한 ‘웅진(熊津)’의 뒷부분이다. 앞부분의 전설은 위와 비슷하다. 뒤에 사당 이야기가 나오므로 향토 편의 ‘고적(古跡)’ 항목에 편입시킨 것이라 여겨진다.
[계룡산신 설화]
계룡산의 산신은 ‘여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이 창건되기 이전에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이라는 ‘천기(天機)’를 누설하였다는 이유로 살해된 주모(酒母) 모녀라는 것이다. 이들이 죽어서 계룡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이 설화는 조선건국과 신원사와 관련된 계룡산 설화인데,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전국 명산대천에 기도하러 다닐 때다. 마침 계룡산에 당도하여 머물렀다. 어느 날 지게에 나무 세 개를 지는 꿈을 꾸었다. 현재의 계룡시 두마면 팥죽거리에 꿈 풀이를 잘 하는 주모(酒母)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주모를 만나러 갔으나 출타 중이었다.
결국 딸에게 먼저 꿈을 이야기했고 나중에 돌아온 주모에게도 그대로 전했다. 주모가 절을 하면서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 지게에 나무 세 개를 진 것은 ‘王’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꿈의 해몽을 듣고 이성계는 천기를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이들 모녀를 죽였다. 주모는 죽어서 계룡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룡산신은 여신으로 트레머리를 한 도상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계룡산 중악단의 산신인 속칭 ‘까치 산신도’는 ‘여산신 그림’을 도둑맞은 후에 새로 구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성계는 왕이 되어 이들의 망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혼사(神魂寺)를 지었다고 한다. 신혼사는 현재의 신원사(新元寺)로 경내에 계룡산 중악단(中嶽壇)이 조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