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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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時代 |
영어공식명칭 | Three Kingdom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고대/삼국시대 |
집필자 | 이헌재 |
[정의]
고구려·백제·신라 및 가야가 병립하였던 시기의 경기도 시흥의 역사와 문화.
[개설]
삼국시대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마한·변한·진한 등 삼한을 계승한 백제와 신라, 가야가 고대 국가로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는 3세기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던 668년까지를 의미한다. 삼국시대는 삼국 및 가야 이외에 부여·옥저·동예 등 여러 나라가 공존한 시기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고구려·백제·신라만이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삼국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고대 국가로서 기틀을 잡은 것은 고구려였고, 이후 백제와 신라가 점진적으로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지역은 백제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 장수왕 때 고구려에 편입된 이래 매소홀현(買召忽縣)과 장항구현(獐項口縣)이 설치되었다. 이어 신라 진흥왕 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시흥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어 당시 설치된 신주(新州)에 편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펴 중국의 요동 및 요서 지방과 부여 지방으로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다. 4세기 초반 미천왕 때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고 황해도 일원으로 진출하여 대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광개토대왕은 392년(광개토대왕 2)에 백제의 10성을 점령하고 396년(광개토대왕 6)에는 백제의 58성 700촌을 복속시켰다.
장수왕은 475년(장수왕 63)에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죽령과 조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시흥 지역을 점령한 이후 매소홀현과 장항구현이 설치되었다.
[백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위지(魏志) 동이전]에 나오는 마한 54국 중 시흥 지역을 비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 온조가 지금의 서울 지역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터를 잡아 백제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이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백제를 세웠던 것이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지닌 유이민은 토착 세력을 누르고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건국 과정이 기록된 온조 설화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서울 석촌동 고분군]이 고구려 초기의 계단식 돌무지무덤과 양식이 비슷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곡창 지대인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는 풍부한 경제력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받아들인 선진 문화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3세기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6좌평(六佐平)과 16관등제(十六官等制)를 시행하고 관등에 따라 관복의 색을 달리하는 지배 체제를 정비하는 등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갖추었다. 이때 시흥 지역도 백제에 복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삼국 간의 항쟁에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 남으로 마한 지역을 완전 병합하고, 북으로 고구려의 평양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을 바탕으로 강력한 해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중국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고, 중국의 산둥 반도, 일본의 규슈 지역과 교류하여 중국과 왜(倭)를 잇는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때 시흥 지역도 백제의 해상 활동에 중요한 요충지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과 매화동에서는 백제 토기 유물 산포지(散布地)가 확인되었다. 연안 항해법으로 중국을 내왕하였던 백제의 항해 기술을 고려한다면 시흥에서도 바다를 통한 중국과의 교역이나 삼국 간의 교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능곡동 선사 유적에서 제1호와 제2호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에서는 백제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백제 토기가 출토된 돌방무덤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橫穴式石室墓)]으로 너비 110㎝ 이상의 관정(棺釘)[관을 짜는 데 사용된 철로 만든 못]이 출토되었다. 이 2기의 돌방무덤의 조성 시기는 5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었다.
[신라]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서 성장하였으며, 433년(눌지왕 17)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백제와 나제 동맹(羅濟同盟)을 체결하였다. 신라는 6세기 들어 지증왕~진흥왕 때 중앙 집권 국가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6세기 중엽 진흥왕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551년(진흥왕 12)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다. 이때 백제는 한성과 한강 하류의 6군을 수복하고, 신라는 죽령 이북의 한강 상류 10군을 차지하였다.
553년(진흥왕 14) 진흥왕은 백제가 수복한 한강 하류 지역[지금의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경기도 일대]을 기습하여 차지하고,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 14년조에는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무력(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지금의 시흥 지역도 당시 신주 아래 편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유적]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있는 군자봉(君子峰) 정상부 일대에 군자산성 유적이 남아 있다. 군자산성은 1977년 문화재관리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높이 187m의 독립봉의 정상에 있으며 삼국시대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다. 정상부에 후대에 지었던 성황당(城隍堂) 자리가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산성은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삼국시대 한강 유역과 남한강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는 요충지의 역할을 하였다. 성곽 주위는 약 400m, 높이는 약 10m이다.”
그러나 군자봉의 실제 높이는 198.4m이다. 군자봉 정상부에 남아 있는 군자산성 일대에서 수습되는 유물로는 다량의 삼국시대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군자봉 정상의 북쪽 지역에서는 주로 회색 와질토기(灰色瓦質土器)가 수습되고, 서쪽 지역에서는 주로 회청색 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가 수습되었다. 군자봉은 조선시대에는 봉수로 사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