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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36
한자 三-二七梁山義擧
영어의미역 Worthy Undertaking of Yangsan in 27th March 1919
이칭/별칭 양산읍내 3·1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7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3월 27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양산읍내 장터
관련인물/단체 엄주태|전병건

[정의]

1919년 3월 27일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양산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운동.

[발단]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던 오택언(吳澤彦)한용운의 지시로 통도사에 내려와 통도사 강원(講院) 학생 대표들과 만나 만세시위를 할 것을 결의하여 1919년 3월 13일 신평의거가 발생하였다. 이어서 양산읍내에 1919년 3월 11일 부산에서 발생한 초량일신여학교 시위, 3월 13일 동래에서 발생한 동래고보생 3·1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3월 27일 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과]

양산의 3·1운동은 읍내에서 3월 27일 시위가 일어나기 이전에 하북면 신평읍에서 3월 13일에 먼저 발생하였다. 한용운의 지시로 통도사에 내려온 오택언을 통해 서울 상황이 신평읍에 전해지고, 이에 통도사 승려들이 신평장날인 3월 13일 통도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인 김상문(金祥文)을 선두로 학생과 승려들이 신평리(新坪里) 장터에서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신평시위에 참가한 김진옥(金鎭玉)은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시위 주동자 김상문은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탈출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그 뒤 김상문은 1919년 8월 25일 경의선의 독고감(獨孤堪), 경원선의 명제세(明濟世)와 함께 경부선 연락 책임 특파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들어왔다. 이외 신평에서는 5월 4일 400여 명의 주민이 재차 시위를 한 것으로 파악된다.

신평에서 일어난 두 번째 시위는 참가 군중들이 상당히 격렬하게 시위에 참가하여 이웃 언양까지 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시위 군중은 일본헌병들의 무기를 빼앗고 시위 지도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하였다. 이를 통해 양산 신평의 2차 시위는 지도부의 면밀한 지도 아래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양산읍내 3·1운동은 3월 11일 부산 초량의 일신여학교 시위와 3월 13일 동래고보생들 중심의 동래시위 소식 등을 알게 된 엄주태(嚴柱泰)가 3월 15일 자신의 집에서 전병건(全秉健)과 만나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고 독립선언서 5장을 복사하면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복사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동조자를 확보하였다.

그 결과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朴三道), 정주봉(鄭周奉), 이귀수(李貴守) 등은 착실한 준비 끝에 예정한 3월 27일 마침내 독립선언서와 공약서 경고문을 가지고 장터로 잠입하였다. 시위 날에 중요 역할을 담당하였던 강재호(姜在鎬), 안덕원(安德元), 전병건을 비롯해 부산부 영주동에 거주하던 전병한(全秉翰) 등은 장날 장사꾼 사이에 끼어 시위를 하였다.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양산헌병대에 검거된 주동자들은 이틀 뒤 부산헌병대에 이관되었으며 곧바로 부산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군중들은 분격하여 다시 궐기하였다. 1차 시위 때 검거를 모면했던 이귀수는 류계문(柳桂文) 등과 함께 4월 1일 오후 2시 사람들을 운집시킨 가운데 양산읍내 시위 주동자를 체포해 간 데 맞서 독립시위를 재차 벌였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이귀수와 류계문 등이 체포되었다.

[결과]

시위의 주동자들 11명은 대구감옥에서 8개월~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양산 3·1운동에 참가한 다수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출옥 이후 1920년대 양산 지역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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