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5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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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浦里都浦祭 |
이칭/별칭 | 산신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문화유산/무형 유산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나경수 |
의례 장소 | 천신당 -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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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음력 1월 14일|음력 7월 14일 |
신당/신체 | 산신당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에서 매년 마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도포리 도포제 는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에서 매년 마을의 평안을 비는 뜻에서 천신당에서 지내는 산신제이다. 도포제는 음력 1월 14일 저녁과 음력 7월 14일 저녁에 지낸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모실 대표자를 선정하고, 비용을 걷어 제물을 장만한다.
[연원 및 변천]
예로부터 도포리는 포구(浦口)로 크게 번창한 마을이었다. 1638년 초 나주에 살던 김해 김씨 김한수, 여산 송씨 송근룡, 경주 최씨 최삼지 세 사람이 당시 무인도였던 도포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주로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1981년에 하굿둑을 막아 육지가 되었고, 지금은 주로 간척지에서 벼농사를 짓는다.
도포리는 원래 영암군 종남면에 속해 있었고 이름도 도싯개·도삿개·도시포·도포 등으로 불렸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나포리와 병합되어 도포면에 속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마을에 ‘잿등’이라는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1980년대에 경지 정리를 하면서 베어 버렸다. 당산나무가 있을 때는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올리고, 천신당에서는 도포제를 모셨지만 지금은 당산제는 없어졌다. 대신 도포제를 일 년에 두 번 지내는데 산신제라고도 부른다.
6·25 전쟁 이후에 약 2~3년 중단되었으나,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젊은 사람들이 죽는 등 마을에 악재가 겹치자 다시 당산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포제를 지내야 할 달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제를 지내지 않고 넘어간다.
[신당/신체의 형태]
마을 뒷산에 제단을 쌓아 만든 제당이 있으며 천신당이라고 부른다. 일 년에 두 번 천신당에서 제사를 모신다. 정월 대보름에 모시는 제사는 당산할머니에게 올리고, 백중에 모시는 제사는 당산할아버지에게 올린다.
[절차]
도포제를 모시는 제관은 세 명인데 ‘도포제 줄다리기 민속 보존회’에서 결정한다. 60~70대 연장자 중에서 거의 정해 놓고 제관을 지내는데, 유고(有故)가 있을 경우에는 ‘도포제 줄다리기 민속 보존회’에서 협의해 바꾼다. 제관은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며 궂은일을 봐서도 안 되는데, 만약에 금기를 어길 경우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여자가 제관으로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음식 제관은 장에서 제물을 사오고, 축문 제관은 축문을 읽는다. 나머지 한 명은 제를 지낼 때 두 제관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예전에는 제사 2~3일 전에 마을의 공동 샘 둘레에 금줄을 쳐 놓고, 그 샘의 물로 제관이 씻고 제물을 마련했다. 하지만 수도 시설이 마련되어 현재는 그런 전통이 없어졌다. 다만 제사 2~3일 전에 마을 주민들이 함께 산신제를 지낼 천신당을 청소하고, 왼새끼로 꼰 금줄을 빙 둘러서 쳐 놓는다. 예전에는 황토를 뿌려 외지 사람 출입을 금했지만 이것도 현재는 하지 않는다.
제사에 드는 비용은 마을 사람들이 모아 마련하는데 정해진 금액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지(燒紙)에 자신의 이름이나 가족들의 이름을 써서 제관에게 주고, 성의껏 돈을 내는데 그것으로 제사 비용을 충당한다.
음식 제관은 제사 날짜에 맞춰 가장 가까운 장에 가서 장을 보는데 보통 영암장, 시종장, 신북장을 이용한다. 장을 볼 때는 특별히 가리는 것은 없으나 깨끗한 마음으로 하고 물건 값을 절대 깎지 않고 흥정도 하지 않는다.
제물은 멸치를 넣은 미역국·밥·시루떡을 준비하고, 조기·전어·병어를 3마리씩 날것으로 준비한다. 생선을 날것으로 올리는 것은 도포리가 포구였던 점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배·사과·귤·나물·곶감·대추·밤을 준비하고 소고기도 날 것으로 준비한다. 제주(祭酒)는 원래 빚어서 썼으나 지금은 막걸리를 사서 쓴다. 제기는 마을 회관에 보관하다가 제를 지낼 때 꺼내 쓴다.
도포제는 음력 1월 14일 오후 5시경부터 준비를 시작한다. 마을 청년 몇 사람과 음식 제관, 축문 제관이 제물을 차에 싣고 제를 모실 곳으로 올라간다. 차가 천신당까지 갈 수 없으므로 근처에 가서 사람이 들고 운반한다. 나무를 모아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해 놓고 밥고 국을 끓일 준비도 마친다. 제관을 도와 제를 지낼 사람과 마을 사람(남자) 몇 사람이 소지 등을 챙겨서 올라간다.
6시경에 마을 사람들이 천신당에 도착하면 주변에 빙 둘러 초를 켜 놓고, 어두워지면 모닥불을 피우고 밥과 미역국을 준비한다. 제관들은 제복으로 갈아입는다. 제관들이 제물을 진설하고, 밥과 국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 음식 제관과 축문 제관이 술을 올리고 두 번 절한다. 그리고 밥과 국이 준비되면 제상에 올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다.
축문 제관이 축문을 읽고 태운다. 또 마을 사람들의 소지를 읽고 복을 빌어준 후에 태워 올리는데, 소지가 많아서 꽤 시간이 걸린다. 소지와 함께 걷어진 돈은 다른 제관 한 사람이 확인한다. 소지를 태우고 나서 숭늉을 제상에 올리고 밥을 말아 놓는다. 그 다음에 술을 한 번 더 올리고 절을 두 번 한 다음 산신제를 마친다. 산신제는 보통 7시 30분경에 끝난다.
제사를 마치고 나면 참석한 사람들이 음복을 하고, 모닥불에 소고기를 구워먹기도 한다. 남은 제물은 천신당 입구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놓는다. 이로써 산신제의 모든 과정이 끝난다.
[축문]
유 세차 ◯◯년 정월 십사일◯◯ 유학 ◯◯ 감소고우 조천당산신위 유좌진산 위촌보호 강복소재 생령무양 서사구정 삼농백숙 육축체전식 실뢰신우 근이생폐지 천길치복유 존영 음향(維 歲次◯◯年 正月十四日◯◯ 幼學◯◯ 敢昭告于 朝天堂山神位 惟莝鎭山 爲村保護 降福消災 生靈無恙 庶事俱精 三農白熟 六蓄涕田息 實賴神佑 謹以牲幣紙 薦吉懥伏惟 尊靈 飮饗)[때는 ◯년 정월 십사일에 유학 ◯가 조천의 당산신께 감히 고해 올립니다. 생각건대 좌진산신께서 마을을 보호하사 복을 내리시고 재앙을 물리치시며 모든 생명에 병이 없도록 하여 주시고, 매사가 서로 잘 어울리게 하시며, 또한 삼농[농업, 농민, 농촌]을 모두 무르익게 하시고 육축과 논밭 역시 실로 신의 보살핌에 의존하옵니다. 하여 제물을 장만하여 엎드려 바치오니 많이 잡수시기를 앙망합니다.]
[부대 행사]
매년 2월 중에 마을 총회를 열어서 도포제에 사용된 비용을 결산한다. 그리고 음력 2월 1일에는 줄다리기와 지신밟기를 한다. 줄다리기는 남자와 여자를 서편과 동편으로 나누어 경기를 한다. 여자 편이 이겨야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포제 줄다리기 는 1990년 남도 문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1991년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서 문화 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영암 왕인 문화 축제나 영암군민의 날 행사에서도 도포제 줄다리기를 선보인다.
현재는 도포리 마을에 사람이 없어서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을 모아다가 줄다리기를 하는 실정이다. 지신밟기 역시 예전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했지만 현재는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주변 마을 사람들과 하는 정도이다.
[현황]
정성껏 제를 지내던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돌아가시면서 제사보다는 줄다리기 행사가 도포제 줄다리기라는 이름으로 더 강화·보존되는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여전히 도포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도포제 줄다리기 민속 보존회에서도 도포제를 계속적으로 지켜 갈 전통문화로 이어 가고 있다.
또한 전해 내려오는 신기한 이야기는 없지만 산신제를 잠시 중단했을 때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고, 암 환자가 발생하는 등 마을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도포리 주민들은 더 굳은 믿음을 가지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도포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