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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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리사지를 돌아보면 사지와 구분지어 야트막한 담장을 두른 곳을 볼 수 있다. 정원석 몇 개를 배치한 평탄한 정원을 연상시킨다. 미륵대원 터이다.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에 사원을 설치하여 불교의 이상세계를 널리 확산시켜 민중의 평안을 꾀하는 한편 유사시에는 사원 세력을 동원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전략을 써왔다. 자연스럽게 사찰 내에 보급을 위한 병참기지도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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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3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서 제천 의병이 일본군을 공격한 전투. 1895년 8월 20일 일본이 을미사변을 저지른 데 이어 친일내각에 의해 1895년 말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전기 의병을 대표하는 제천 의병의 항쟁도 이루어졌다. 수운(水運)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가흥리에 설치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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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일본이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 지역에 설치한 병참기지.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강점한 일본이 이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흥에 설치한 병참기지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대대적인 군대를 파견한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어 청국(淸國)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6월 23일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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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의 중요 전적과 조선 전기의 역대 실록 그리고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여 충주시가지가 불탈 때 시가지 내에 있던 충주사고와 그에 보관된 서책들도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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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문신. 1231년 몽골군이 충주성을 공격했을 때 우종주가 이끄는 양반별초와 유홍익이 이끄는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가 방어에 나서게 되었다. 몽골군과의 교전 중에 양반별초는 도망가고 노군잡류별초가 끝까지 항전하여 충주성을 지켜냈다. 몽골군이 물러가자 양반별초가 돌아와 관가와 민가의 은그릇이 없어진 것이 노군잡류별초의 소행이라 하여 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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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고종 43) 4월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산성에서 충주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후원을 얻어 공동 작전을 취했을 때이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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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법정동. 충주역이 있어 역전동이라 불렀으나 충주역이 봉방동으로 이전하여 동 이름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선진 문화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자’는 뜻에서 문화동(文化洞)으로 개칭하였다. 문화동은 원래 충주성(忠州城) 서문 밖 충주천 건너에 있던 작은 마을로 서북쪽으로 충주 탄금대로 가는 길과 서쪽으로 서울과 청주로 가는 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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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직동과 살미면 재오개리 사이에 있는 고개. 재오개리 발티마을 뒤에 있는 고개로서, 옛날 삼남대로로 통하는 대로의 첫 고개가 이곳이었다고 한다. 충주의 진산인 남산과 대림산 사이에 위치하며, 남·북 산줄기가 동·서로 자르는 구조선을 따라 풍화, 침식되면서 낮아진 능선부가 고개로 활용된 것이다. 주변 산지와 함께 흑운모석영편마암(계명산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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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사회의 변혁과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집단적으로 전개되는 일체의 행동. 현재 충주는 충청북도 북부 지역의 교육 전문직 및 상업 관련 자영업, 사무직, 서비스업, 그리고 농업 등의 종사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제조업 종사자는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충주 지역 사회 운동의 흐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체계적인 자료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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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터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 앞에서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000여 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희생이 큰 전투였다.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士民)과 관속(官屬)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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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북도 충주의 역사. 지리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충주시 용탄동과 조동리 등의 유적과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이를 시사해주고 있다. 이들 유적과 유물은 선사 문화의 시원과 이동, 전파 및 취락의 형태를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선사 유적이 형성된 배경은 어업에 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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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몽고군의 충주성 공격 때 충주 지역 사람들이 월악산의 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당. 1256년(고종 43년) 4월 29일에 몽고군이 충주성을 공격하자 관리들과 노약자들은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고 월악신사로 올라갔다. 몽고군이 이들을 추격하는데,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끼고 비바람과 번개와 벼락이 함께 들이쳤다. 이에 몽고군은 신이 난민을 돕는 것이라 여기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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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국가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조직했던 자위군. 의병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국한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우리 역사의 전 시기에 걸쳐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일어났던 민병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용어가 같다는 이유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말 의병전쟁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일어났던 다양한 성격의 의병이 동일하게 이해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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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이치의(李致儀)이며, 생부는 이형의(李衡儀)이다. 이기진은 20대 초에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에서 강학하던 유중교(柳重敎)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화서학파에 입문하였고, 유중교 사후에는 장담마을의 선비들을 이끌던 유인석(柳麟錫)을 좇았다. 명성황후가 일본군에게 피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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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충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충주는 국토의 중심이었고 예부터 사통팔달의 도시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한 충주 지역 자체에서 인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음도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고장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면면을 지녔기에 충주를 인물의 고장이라 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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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조선을 침입한 왜군과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의 전쟁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포에 이어 동래를 점령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여, 상주 전투에서 이일(李鎰)을 격파하고 충주에서 신립(申砬)을 깨뜨린 뒤 이렇다 할 전투도 치르지 않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가고, 조선은 7년 동안 일본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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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매년 중원 문화와 관련하여 열리는 학술 행사. 중원 문화라는 말은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권 지역에 형성되었던 역사·문화·사회·정치·경제 등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보통 중원이라 하면 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과거 통일신라시대부터 나라의 중심이라는 개념으로 중원경, 중원소경 등의 지명으로 사용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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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법정동. 본래 충주목, 충주군의 소재지로서 충주읍내, 남변면(南邊面)의 중부리(中部里) 또는 성내동(城內洞)이라 하였다. 광복 후에 충인동으로 개칭되었다. 충인동은 충성스럽고 어진 마음씨와 자애로운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여지도서 (輿地圖書)』 충원현조에 의하면, 원래 이 지역은 남변면의 중부리 지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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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산성. 충주 대림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과 살미면 향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대림산[487.5m]의 정상부를 포함하는 능선과 계곡부를 가로지르며 축조된 둘레 4,906m의 토석혼축 포곡식 산성으로, 고려 1253년(고종 40) 몽고의 침략에서 최대의 승전을 거둔 충주 남산성 전투의 현장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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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있는 조선 후기 충주목사가 집정하던 동헌.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277년(충렬왕 3) 충주성이 개축(改築)되었고 1870년(고종 7) 병인양요 후 조칙에 의해 충주성이 개축되었다고 한다. 충주 청령헌은 1870년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하여 세웠다. 그 후 1895년(고종 32)에 전국이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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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 후기 축성에 대한 사적비.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를 겪은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조칙이 내려오자 1869년 2월부터 읍성을 개축하기 시작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준공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화강암 충주 축성사적비를 세웠으며, 앞면에는 축성 연대와 성의 크기, 문루의 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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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몽항쟁은 1231년(고종 18)부터 1273년(원종 14) 삼별초군의 패망에 이르는 40여 년이란 장구한 기간 동안 전개되었다. 1225년(고종 12)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된 뒤, 몽고는 1231년(고종 18) 조공 거절 및 저고여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에 대한 제1차 침입을 필두로 1254년까지 8차에 걸쳐 한반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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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역은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로 고대부터 철광산이 개발되어 철광석을 캐고, 쇠를 뽑고 녹이고 두드려 각종 무기나 농구 등의 연모를 만들던 쇠부리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고대 국가의 힘의 상징인 철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은 공히 충주 지역에 공을 들였으며 충주 지역을 확보한 국가가 항상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충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하던 자원의 보고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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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에 있는 박물관. 충주박물관은 중원 문화권의 학술 연구와 유물 및 유적 등을 보존하고 박물관 학교 와 각종 특별전 등의 행사를 통하여 시민과 함께 하는 박물관 실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86년 11월 25일 성내동에 유물전시관을 개관하였다. 1991년 6월 29일 충주박물관 직제에 대하여 의회 승인을 받았다. 1992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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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왕실의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였던 창고. 충주는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방(關防)으로서 중요한 요충지이고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 때문에 외적의 방어에 용이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인 점이 고려되어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 사고 관리는 충청도관찰사와 충주목사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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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충주성에서 제천 의병과 관군·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로 인식한 유생들은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반침략 운동과 반개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도발하면서 한층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모 시해에 항거하여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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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12월 충주성에서 노군과 잡류별초를 중심으로 한 충주민이 몽고군을 물리친 전투. 몽고의 지나친 조공 요구로 고려와 몽고의 화의가 깨어지자 몽고는 저고여(箸古與) 살해 사건을 핑계로 1231년 8월 고려를 침입하였다. 1231년 8월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지금의 의주]을 함락하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거쳐 12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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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일대에 있던 조선시대 읍성. 충주읍성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치른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고 대오와 군저를 확장하고 포수를 배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명을 받고, 1869년(고종 6) 2월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읍성을 개축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완성하였다. 이때 개축된 성의 둘레가 3950척, 두께 25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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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땅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 풍수지리란 산의 배치와 물의 흐름, 지형과 방위, 하늘과 땅의 기운 등을 고려하여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충주 지역의 풍수지리는 삼국시대부터 언급되고 있으나 자연과 사람을 연결시켜 비교적 자세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