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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136
한자 人物-寶庫-忠州
영어의미역 Chungju, the Treasure House of Great Me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집필자 길경택

[개설]

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충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충주는 국토의 중심이었고 예부터 사통팔달의 도시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한 충주 지역 자체에서 인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음도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고장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면면을 지녔기에 충주를 인물의 고장이라 칭하는 것도 결코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충주의 주체는 충주 사람이기에 바로 충주 사람이 과거의 명성을 만들었고 현재 충주의 모습을 규정해 왔다. 인물이 나고 사라짐은 시대 변화와 민감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기도 한다. 충주가 큰 고을로 대접받을 때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활약하거나 각계에서 큰 족적을 남겼던 데 반해 소외된 곳으로 취급될 때는 역사상 기록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수가 많지 않았다.

[충주를 빛낸 인물, 명현 5위]

충주에서는 매년 가을에 우륵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그 첫 행사가 충주 유림에서 주최하는 명현추모제이다. 충주가 배출한 명현들에게 한 해 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신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고 있다. 명현추모제는 충주 유림에서 주관하고 있는데 여기에 모셔지는 명현은 모두 5명이다. 악성 우륵, 대문장가 강수, 해동필가의 조종이라 일컬어지는 김생, 임진왜란 시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 충주 출신의 용장 임경업 등 5명이다.

명현 5위의 선정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충주 지역에서 많이 알려져 있는 유명한 인물들을 뽑은 것으로 짐작된다. 한때 명현이라 함은 이름난 현인을 말하는 것이기에 칼보다는 붓을 가까이 한 문인에 가까워야 한다는 선입관을 갖을 수도 있으나 충주의 명현은 ‘충주를 빛낸 인물’ 정도의 개념으로 충주인들의 관념 안에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륵은 가야국에 궁중 악사였으며 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귀화했는데, 진흥왕은 국원에서 편안히 살게 해주었다. 551년 진흥왕이 낭성에 갔을 때 우륵과 제자 니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하였다. 다음 해 진흥왕이 대나마 법지, 계고와 대사 만덕을 보내 업을 전수하게 하니 우륵이 그 기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금(琴)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우륵은 우리나라 3대 악성 중의 한 사람이다.

강수(强首)중원경의 사량 사람인데 부친은 석체 나마였다. 태종무열왕 때 당의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데가 있어서 무열왕강수를 불러 물었다. 강수는 한번 보고 해석하여 설명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부곡의 풀무장이 딸과 야합하였고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답설인귀서」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생(金生)은 해동필가의 조종으로 칭해지는 인물로 만년을 북진 김생사(金生寺)에서 보냈다. 김생은 부모가 한미하여 그 세계를 알 수 없으나 711년(경덕왕 10)에 출생하였고, 글씨 쓰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하여 예서·행서·초서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김생의 필적은 고려시대에 보배로 삼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듯 충주는 음악가, 대문장가, 명필이 살아 숨 쉬는 고장일 뿐 아니라, 정치·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고장이다. 임진왜란 시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분전하였으나 패배한 신립과 병자호란 때 청의 수도 심양을 치자고 주창한 임경업이 자라난 고장이기도 하다.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인물, 충주 토성]

우리나라에 성씨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문종 때부터라고 추정되고 있으며 성에는 관이 있어 적(籍)·본(本)·본관(本貫)·관향(貫鄕)이라 부르기도 하는 데 통일신라 말기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는 성의 근거지가 되는 지명에서 취해진 것으로 그 성씨의 우월성을 나타낸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성씨는 275성이고 본관은 3,349개로 나타나고 있다.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54개이고, 이 가운데 22개의 성씨가 현재 충주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충주의 토성으로 유(劉)·서(徐)·석(石)·최(崔)·강(康)·양(梁)·진(秦)·안(安)·박(朴) 등이 나타난다. 또 내성(來姓)으로 견(堅)·정(鄭)의 2성이 있고, 외촌성으로 혜(嵇)·지(池)·어(魚)의 3성이 기록되어 있다. 군·현 토성은 읍치의 지배 성단인 ‘인리성(人吏姓)’과 촌락 지배 성단인 ‘백성성(百姓姓)’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성씨의 수장은 후삼국시대에는 성주·장군·촌주 등의 직함을 지니면서 지방 세력을 대표하던 호족이었으며, 고려의 개국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 또는 거주지 별로 군·현 토성이 되어 갔다.

충주유씨는 고려시대 호족으로 대단한 세력을 떨쳤던 성씨이다. 고려 태조 왕건유긍달(劉兢達)의 딸을 맞이하여 신명순성왕후로 봉하였고 그의 소생으로 정종·광종이 각각 고려의 3대와 4대 왕이 되었다. 특히 광종은 어머니를 위하여 충주시 신니면에 원찰 숭선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충주유씨는 고려 초기에는 외척 세력으로 강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광종 사후에는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세력은 어느 정도는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최근 기록으로는 조선 말기 충주목사 조병로충주읍성 수축을 기념한 축성사적비에 충주유씨들이 당시까지 사회경제적 세력을 과시하는 집안이었음이 나타난다.

충주석씨는 고려 후기의 문신 석주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충주최씨의 시조는 최승(崔陞)이다. 최승은 신라 말 889년(진성여왕 3)에 상장군으로 원종·애노의 난을 진압하여 은청광록대부에 올랐고, 충주에 살게 되면서 호족으로서 세력을 크게 떨쳤다. 충주양씨의 시조는 양능길(梁能吉)이다. 양능길은 제주양씨의 후손으로 고려가 건국되고 후삼국을 통일할 때 공을 세워 삼한통합대장군이 되었고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져 관향을 충주로 하였다. 충주박씨의 시조는 조선 전기의 명신 박영(朴英)이다.

충주지씨의 시조는 지경(池鏡)이다. 본래 중국 기주인으로 960년(광종 11)에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귀화하여 벼슬하였고 6세손인 지종해가 충주에 거주하면서 중원백에 봉해진 후에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충주어씨충주지씨에서 분리된 성씨로 시조는 어중익(魚重翼)이다. 겨드랑이에 비늘이 3개 있어 고려 태조가 ‘비늘이 있는 것으로 고기다’ 하며 어씨 성을 사성하였던 데서 유래하였다. 충주어씨의 명성을 높이 날린 후손으로 어유소가 있다. 그밖에 충주서씨·충주강씨·충주진씨·충주안씨·충주혜씨 등 충주를 본으로 하는 성씨가 다수 전한다.

[충주가 낳은 명장과 무인]

몽고의 침입은 고종 연간에 시작되어 8차에 걸쳐 3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고려는 무신 정권 시대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적인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 과정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김윤후는 당시 승려였지만 몽고의 2차 침입 시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적장 살리타이[撒禮塔]를 화살 한 대로 쏘아 죽인 후 조정의 권고에 의해 환속하고 충주 남산성 방호별감으로 임명되었다.

1253년 몽고의 5차 침입 시 몽고군은 기세등등하게 남쪽으로 진격하던 중 충주성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충주 남산성으로 피난한 노비 및 민중들이 장기간 포위당한 상태에서 군량미 등이 부족하여 기운을 잃게 되자 김윤후는 노비 등의 천민을 모아 놓고 “만일 모두 힘을 내어 싸워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줄 터이니 모두 나를 믿어라” 하고, 그들 앞에서 노비 문서 등을 불태우고 그동안 빼앗은 말과 소를 나누어 주고 싸우게 하니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몽고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70여 일의 포위를 풀고 더 이상 남쪽으로 진격하지 못한 채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 이후 약속대로 공이 있는 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으며 충주도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김윤후도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벼슬을 하였다. 몽고와의 전투에서 충주인은 모두 9차례에 걸친 전투를 수행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는데 김윤후 이외에 승녀 우본, 지광수, 우종주 등과 창정 최수 등의 충주인의 이름이 나타난다.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조총이란 신무기를 갖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때 활약한 인물로 신립 이외에 김여물·이종장 등 종사관이나 목사를 비롯하여 8,000명의 이름 없는 병사들이 있었다. 또 충주 가흥리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백기장군 조웅(趙熊)[?~1592]이 있다. 조웅의 호는 백기당(白旗堂)이고 본관은 한양으로, 빼어난 재질에 기개가 호탕하고 영특한 인물이었다. 조강(趙綱)에게 사사하여 유학을 수업하다가 뜻한 바 있어 무예를 익혔으니, 조강도 그가 간성의 재목임을 알아차리고 무예를 권하였다고 한다.

조웅은 뛰어난 무예로 1591년(선조 24)에 조헌(趙憲)에 의해 국왕에게 추천되어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할 때 신립이 충주 달천 전투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에 조웅은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워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 충주의 태자산 아래에 주둔하여 서울로 북상하는 왜적의 후속 부대를 물리쳤다. 조웅이 기치를 모두 흰색으로 하여 군호를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백기장군(白旗將軍)이라 하였다. 벌떼같이 일어났던 팔도 의병 중 호서의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장군 곽재우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조웅은 공으로 충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사령장을 받지도 못한 채 중과부적으로 왜적과의 싸움에서 끝내 죽음을 당하였다. 1605년(선조 38) 4월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1618년(광해군 11)에는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조웅에게는 부인 나주최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 조희성과 조희영이 있었다. 숙종 연간에 정려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허물어졌던 것을 1980년 11월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에 종손이 보관하였고 있던 정려의 현판을 걸고 복원하였다. 충주 탄금대에는 후손들에 의해 백기장군 조웅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충주 무인의 계보를 잇는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효종 때 북벌 계획으로 유명했던 이완 대장의 아버지 충무공 이수일(李守一)[1554~1632]이다. 자는 계순이며 호는 은암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1554년(명종 9)에 충주 서촌의 시곡에서 태어났으니 지금의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에 예속되었다가 1590년에 선전관이 되었다. 1591년에 장기현감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을 겪었다. 회령부사·나주목사를 거쳐 1596년 정유재란 때에는 성주목사로서 명령을 어겨 결장 종군되기도 하였으나 1605년(선조 38)에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도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겸부원수가 되어 안현에 진을 치고 이괄의 무리를 격퇴하였고, 이 공으로 진무공신 2등에 녹훈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가 부원군에 추봉되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79세로 별세하니 좌의정에 증직되고 뒤에 충무(忠武)라 시호했다. 묘소는 충주시 중앙탑면 오석리에 있으며 지방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묘소로부터 서남쪽 전방에 사당인 충훈사가 있다. 그 앞으로 이경홍이 찬하고 김좌명이 글을 쓴 신도비가 있는데 1667년에 세워진 것이다. 충주박물관에 있는 이수일 진무공신녹권 및 영정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명장 임경업(林慶業)[1594~1646]도 충주인으로 명현 5위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택이며 자는 영백, 호는 고송이다. 충주 달천촌 출생으로 판서 임정의 7대손이며 임황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아우 임사업과 함께 무과에 합격하고 무관으로 정진하며, 이미 망해가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하여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의 생애는 충의·지조·용기 등으로 점철되어 민중의 마음에 자리하였으니, 뒤에 임경업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소설 『임경업전』이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선천의 충민사, 백마산성의 현충사, 겸천의 충렬사 등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민이다. 임경업의 사당인 충렬사는 사적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충주 무인의 계보는 조선 말기 의병 전쟁 시 독립운동가 백남규로 연결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충주 출신의 이종근·진치범·안갑준·노연웅·이강원·윤일영·임관빈 등으로 연결되고 있다.

[충주가 낳은 불교의 대선사들]

고려 말, 조선 초 충주 지역은 선승들이 크게 활약한 곳이었다. 현재는 제천시에 속하는 월악산 송계계곡의 월광사지라는 흔적만 남아 있지만 원랑선사(圓朗禪師)가 주석했던 곳이고, 동량면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중국 유학을 통하여 새로운 선 사상 유입에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 말기 대지국사 목암 찬영보각국사 환암 혼수의 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지역의 선불교 전통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고려 초기 법경대사 현휘[879~941]의 활동에는 충주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과 고려 태조 왕건의 호족 세력 융합이라는 정치적 배경도 작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즉 충주유씨와의 밀착 관계를 보인 법경대사는 수행과 교화를 펼치는데 많은 후원을 얻을 수 있었고 나아가 태조 왕건의 후원도 있었기에 정토사가 거찰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법국사는 끊임없는 구도의 길을 추구하여 중국에 유학하는 동안 여러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귀국 후 개경의 보제사와 봉은사 등에서 홍법 전도에 전념하였다. 홍법국사가 국사에 추증될 때 그의 승계는 대선사(大禪師)였다. 정토사를 하산소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 충주가 고려 건국기 정치적 결합을 이룬 지역으로서 고려 왕실의 입장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각국사 환암 혼수[1320~1392]는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소요하고 자재하는 것들이 도의 근본이라 하였고, 계율을 굳게 지키고 선교의 여러 경전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거의 스승을 두지 않고 스스로 통하였다. 남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고 강해(講解) 또한 자상하고 밝았다고 하며 당대의 명망 높은 이색, 이숭인 등과 깊은 교유를 하였다. 조선왕조는 숭유억불을 국시로 정한 시기였으나 태조 이성계보각국사의 비문을 권근에게 쓰라고 명한 데서도 태조보각국사를 얼마나 존중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대지국사 목암 찬영[1328~1390]은 정치적으로 말세요, 종교적으로 말법 시대인 고려 말기의 인물로 정치적 혼탁과 불교계의 혼란을 피하여 참선과 교육에 몰두하였다. 고려 말기 국사와 왕사를 지내며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혼수찬영 두 고승이 충주에 주석하였고 이들의 문도가 조선 불교계를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충주의 위상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충효의 고장, 충주의 효자]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가면 충주목사 이가환이 14세 어린 아이의 행적을 기록하여 만든 효자비를 보호각을 세워 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효자 풍산 홍차기 비(孝子 豊山 洪此奇 碑)이다. 비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때 노은면 가신리 가정마을에는 홍차기가 살고 있었고,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어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고 한다. 홍차기가 10세가 되자 어머니는 아버지 일을 알려주었고, 홍차기는 즉시 서둘러 한성으로 올라가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지극한 효성으로 옥바라지를 하면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관청에 호소하기를 반복하였다.

아버지의 죄를 완전히 벗기기 위하여 한성까지 천여 리를 수차례 오르내리면서 탄원하던 중에 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소년의 지극한 정성이 통했는지 왕은 억울함을 인정하여 아버지를 석방하였지만 병석에서 신음하던 어린 홍차기는 뒤늦게 소식을 듣고 미소를 띠며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한다. 이때 나이가 14세였다. 홍차기의 효성에 감복하여 충주목사 이가환홍차기의 행적을 적어 효자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충주 지역 효자의 한 예인데, 충주 지역에는 효자·효녀가 58명이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효행이 뛰어난 지역이다. 대체적으로 부모가 병중에 있을 때, 계절에 맞지 않는 과일을 찾는다거나 구하기 어려운 먹거리를 갖은 고생을 다해서 구해 드린다거나, 부모가 위급 시에는 단지(斷指)를 하여 피를 흘려 소생시킨다든지, 먹거리가 없을 때는 자기 허벅지를 베어 대접하거나, 부모의 병 깊이를 알기 위해 대변을 맛보는 등의 행적을 남기고 있다. 주덕읍 대곡리에 효자문이 있는 조선 후기의 전오석(全五錫), 소태면 동막리에 정려가 있는 매헌 이성국(李誠國)[1576~1657], 충효를 겸비한 손순효(孫舜孝)[1427~1497] 등 많은 이의 귀감이 되는 충신·효자·효녀·열녀가 많았던 충절의 고장이다.

[충주의 예술인]

충주는 우륵·강수·김생의 예에서 보듯이, 문화 예술의 고장이며 예술가가 많이 배출된 예향이다. 조선시대 문화 예술인으로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김예몽(金禮蒙)[1406~1469]이 있는데 세조 때 대사성에 올랐던 인물이다. 충주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 시관이 되어 뽑은 인재가 뒷날 조정의 현직을 차지하여 빙감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경이고 아들 김성원이 찬한 행장이 있으며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막현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삼탄 이승소(李承召)[1422~1484]는 『국조오례의』를 편찬하는 등 제사의 간행·보급을 주도하였다. 이조판서·형조판서·우참찬·좌참찬으로서 문명을 드날렸던 인물이다. 우연히 사물을 접하더라도 힘써 대체를 알고자 하였고 널리 독서하여 예·악·병·형·음양·율·역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청렴하여 집안을 장식함에 꾸민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삼탄집』이 있다. 향년 63세로 별세하니 시호를 문간이라 하였다. 충주시 대소원면 매현리에는 1904년에 창건하고 1934년에 중건한 사우가 있다. 이승소의 문집 『삼탄집』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다른 문인으로는 손밀의 아들인 충주시 산척면 원월리에서 태어난 손순효[1427~1497]가 있다. 1451년(문종 1)에 생원시, 1453년(단종 1)에 증광문과, 1457년(세조 3) 문과중시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1496(연산군 2)에 판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병으로 별세하니 문정이라 시호하였다. 손순효는 성리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였으며, 특히 『중용』·『대학』과 역학에 정통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났으니 붓을 들면 문장이 이루어지는데 풍행유수와 같다고 하였다. 그림은 화죽에 능했는데, 시인들이 선풍도골이라 칭찬하였다. 문집이 있으며, 평해의 운암원에 배향되었고,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향정마을에 묘소가 있다. 극암 이창신이 찬한 신도비도 있다.

[충주는 양반고을]

충주는 양반고을로 목사가 다스리던 큰 고을이었다. 목사는 조선시대 관찰사 밑에서 각 목(牧)을 다스리던 정3품 동반 외관직(外官職)이다. 목은 큰 도(道)와 중요한 곳에 두었다. 충주는 충청도관찰사와 충주목사가 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충청도에서 가장 중요한 고을이었다. 조선시대 목사가 다스리던 고을은 대략 20곳 정도였다. 그 중 충청도에는 충주·청주·공주·홍주에 목이 설치되었고, 목사가 고을을 다스렸다.

충주목사를 지낸 인물 중에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태종 때 충주목사를 지낸 맹사성(孟思誠)[1360~1438], 중종 때 충주목사를 지낸 박상(朴祥)[1474~1530], 선조 때 충주목사를 지낸 정구(鄭逑)[1543~1620], 인조 때 충주목사를 지낸 이식[1584~1647], 효종 때 충주목사를 지낸 송시열(宋時烈)[1607~1689], 헌종 때 충주목사를 지낸 김조순(金祖淳)[1765~1832] 등이 있다.

충주에는 과거 급제자가 많았다. 식년시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보며 33명을 뽑았다. 그러나 별시는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보기 때문에 시기나 인원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문과 식년시에는 지방 사람들이 많이 응시하였고, 별시에는 한양의 유력한 집안 자제들이 많이 응시하였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중에는 한양 출신이 가장 많다. 지방 출신으로는 안동·평양·상주·충주 등이 많았다. 이들 도시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거점 도시였으며, 학문적으로도 맥이 이어져 오던 전통 도시였기 때문이다.

충주는 문과 급제자 수에서 7위, 생원진사과 급제자 수에서는 3위 또는 6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 후기로 올수록 충주 지역 과거 급제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조선 숙종우암 송시열에게 배운 노론의 학맥이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충주에는 관리와 선비들이 낙향하여 많이 살았는데 지천서원의 십청헌 김세필(金世弼), 규정 신후재(申厚載), 장암사당정호(鄭澔)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십청헌 김세필팔봉서원과 지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는데, 팔봉서원대소원면 문주리에 위치하여 충주에 속하나 지천서원은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로 음성에 속한다. 규정 신후재도 충주의 오갑산 아래에 은거했던 인물이나 신후재가 머물던 오궁리가 지금은 음성군 감곡면이 되었다.

중앙탑면 누암리 창동에는 장암을 배향한 사당이 있다. 장암 정호는 원래 누암서원(樓巖書院)우암 송시열, 노봉 민정중(閔鼎重), 수암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누암서원이 훼철되었고, 영일정씨 후손들에 의해 누암서원 건물 중 북청 향현사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장암 정호의 사당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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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과시험 합격자 거주지별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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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 진사 시험 합격자 거주지별 통계

[주기파의 학맥과 노론의 중심지]

율곡 이이(李珥), 사계 김장생(金長生),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 장암 정호로 이어지는 서인과 노론의 주자 학맥이 조선 중·후기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주자학의 주류는 수암 권상하[1641~1721], 남당 한원진(韓元震)[1682~1751]으로 이어지며, 또 다른 유파는 도암 이재(李縡)를 거쳐 미호 김원행으로 이어진다. 금천면 루암리에 낙향해 살았던 장암 정호[1648~1736]의 학맥은 그의 손자인 염재 정실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 중·후기 양반 고을 충주의 위상은 수암 권상하장암 정호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노론 계열과 쌍벽을 이뤘던 남인의 거두 묵재 허적[1610~1680]도 이곳 엄정면 괴동리 출신이다. 할아버지 허잠(許潛)이 성주목사를 할 때 한강 정구퇴계 이황의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남인 계열의 집안이 되었다. 허적(許積)은 대동법을 시행하고 상평통보를 발행하는 등 경제적인 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소태면 오량리에는 허한허적 부자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주기파의 학맥과 노론 붕당의 중심이 충주였는데, 이는 수암 권상하, 직재 이기홍(李箕洪), 장암 정호의 활동 무대가 바로 충주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수암 권상하[1641~1721]의 묘는 충주시 동량면 음양지에 있으며 활동 지역은 당시 충주목에 속하였던 청풍 황강서당이었다. 권상하의 제자 중 대표적 인물은 한원진이간이다. 이들로부터 호락논쟁이 시작되었고, 호락논쟁은 점차 교조적으로 변질되어 가던 성리학의 흐름을 인간에서 자연계에까지 확산시켰으며 새로운 인식의 장을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락논쟁이란 한원진이 인간과 동물의 성품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주장한 반면, 이간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성을 부여받았으나 그것이 인간과 다른 것은 기질의 한계 때문이라는 인물성동론을 각기 주장하면서 벌였던 논쟁이다. 권상하송시열의 유훈을 받들어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를 건립하여 제향하였고 숙종의 뜻에 따라 대보단을 세웠다

이기홍[1641~1708]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효릉참봉에 임용된 후 스승 송시열의 무고를 주장하다 5년간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으며 잠시 관직에 복귀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사의를 표하고 연풍 문산에 수락정을 세우고 살면서 권상하와 왕래하며 경사를 강론하고 화양동 등 사문의 유적을 순례하며 소일하였다.

정호[1648~1736]는 스승 송시열이 귀양 가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형제들의 강권에 정시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을 시작하였지만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였고 소론과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였다. 영의정까지 역임하고 영중추부사로 사직하였다. 정호는 일생을 노론의 선봉에서 활약하였으며 늘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충청도 노론의 중심지가 충주였지만, 이곳에는 남인으로 서인이었던 우암 송시열과 논쟁하고 교유하던 묵재 허적[1610~1680]이 있었다. 허적은 충주시 엄정면 과동리에서 태어나 163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각종 관직을 거쳐 1667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송시열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 인선대비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하여 채택됨으로써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 정권을 이룩하였다. 1678년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하여 상평통보를 주조, 통용하게 하는 기로소에 들었으나 무고로 사사되었다. 묘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에 있으며, 사우도 여기에 있어 그의 아버지와 함께 배향되고 있으며 어린 시절 성장 시 도깨비의 도움을 받으며 수학했다는 전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근현대를 빛낸 충주의 인물]

충주 출신으로 각 방면에서 활약한 인물은 다른 고장과 비교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근대 독립 운동사에 있어 활약한 우근 유자명(柳子明)에서부터 학계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정계에서 활약하던 이종근(李鍾根)·김선길(金善吉)·이택희(李宅熙)·이시종(李始鍾), 관계에서 장관·차관을 역임한 김영준·박상규, 의학계에서 활약하던 위암의 세계적 권위자 김진복이나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의 김국기, 문화계의 신경림·유종호·한명희, 군에서 활약한 안갑준·노연웅·이강언·윤일영·임관빈 등 어느 분야에서나 최고에 근접해 있는 인물들을 다수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충주의 대표적 현대 인물은 유엔사무총장 반기문(潘基文)이다.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은 2007년 1월 1일부터 정식으로 임기를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 역사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1944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났으나 충주로 이사하여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충주에서 자랐으며 대학은 서울로 진학하였다.

외교관의 꿈은 충주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인 1962년 적십자사 비스타(VISTA) 프로그램의 한국 대표 4명에 뽑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반기문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공부하며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다. 현재 192개 회원국이 있는 유엔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최고 수뇌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반기문은 1961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유엔사무총장을 역임한 미얀마의 우탄트에 이어 두 번째로 유엔사무총장에 올랐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각종 국제 분쟁 지역에서 중재와 화해, 평화의 메신저를 전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속세의 교황, 지구촌의 재상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이면에는 속죄양(Scape Goat) 또는 무능한 전능자라는 우려의 표현도 있다. 각 국가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 특히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 외줄타기를 하게 되는 얼굴마담으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걸어온 삶의 꼼꼼함과 근면·성실, 따뜻하면서도 마음을 이끌어내는 리더쉽이라면 앞으로 세계는 전대미문의 황금시대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이런 인물들이 충주가 인물의 고장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15 행정지명 명칭 현행화 가금면에서 중앙탑면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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