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
-
조선 말기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 있던 조창.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9곳의 조창(漕倉: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을 두었는데, 가흥창은 그 중의 하나이다. 충주는 남한강이 흘러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도시가 발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남도 수군에 12창을 설치할 때 덕흥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덕흥창에는 판관을 두고 충주 부근의 조세를 수납하여 경창으로 수송...
-
1894년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유생 이면재가 쓴 일기. 조선 말기 충주 지역(당시 청풍)에 살던 이면재(李冕宰)는 한말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유인석 등과 교류하였다. 이면재는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을 뒤따라 1896년 6월부터 서울을 경유, 황해도·평안도를 거쳐 서간도로 가서 이듬해 1월 제천으로 되돌아올 때까지의 일정을 기록한 『서행일기(西行日記)』의 저자 이조승(李肇承)의 족숙(...
-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태숙(泰叔), 호는 사천(沙川)·운촌(雲村). 아버지는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인백(金仁伯)이다. 박지계(朴知誡)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30년(인조 8) 식년시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스승 박지계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상소하여 구명했고, 1635년(인조 13) 박지계가 별세하자 1년 동안...
-
충주는 남한강의 중류에 위치하여 삼국시대부터 수로 운송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어 온 지방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세곡을 저장하는 12조창을 설치하였는데 충주에 설치한 조창이 덕흥창이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는 덕흥창 이외에 경원창이 설치되어 경상도의 세곡을 받아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1465년(세조 11)에는 금천(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 있던 덕흥창...
-
충청북도 충주시 성남동에서 만삭장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만삭장’은 옛날부터 충주의 지신을 진압하기 위하여 해마다 대보름날 경에 줄다리기를 하던 곳이다. 「만삭장」 이야기는 줄다리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밝혀주는 지명유래담이다. 충주시를 동서로 양분(솔정이들과 갈매기들을 동군, 그 반대쪽을 서군)하여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행하던 줄...
-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무덤. 충주는 신라시대 중원경(中原京)으로 운영된 이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충청도의 중심지로 기능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많은 인물이 충주에 거주하고 묻혔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서(徐)·석(石)·최(崔)·유(劉)·강(康)·양(梁)·진(秦)·안(安)·박...
-
조선 중기 이후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전래된 서양의 학문 및 종교. 조선시대 선조 이후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문물과 한역(漢譯)된 서학서가 전래되었다. 이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조선 학자들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서학이라는 용어는 협의로는 천주교를 가리키기도 하나, 광의로는 서양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경향을 뜻한다. 18세기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서 정월 대보름날 전후에 행해지던 돌싸움 놀이. 온천리는 문경새재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영남 지방과 호서 지방을 가르는 곳에 있어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영향을 받는 지역이었다. 또 온천이 발달하면서 외지인의 출입이 잦아 마을 사람들의 단결력이 다른 지역보다 필요한 곳이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마을 청...
-
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충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충주는 국토의 중심이었고 예부터 사통팔달의 도시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한 충주 지역 자체에서 인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음도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고장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면면을 지녔기에 충주를 인물의 고장이라 칭하...
-
조선시대부터 충청북도 충주에서 5일마다 열리는 사설 시장. 고려시대에 주현 관아 부근에서 낮에만 열렸던 정기 시장은 조선시대에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생산의 지역적 불균형과 흉년과 같은 자연 재해의 영향으로 15세기 말부터 장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현했으며, 16세기 이래 급속히 확산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개를 넘어섰다. 장문은 양적으로 확산되면...
-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과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던 고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울과 동래(부산)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였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조령은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이 있으며, 이들 관문과 성벽은 1708년(숙종 34)에 축조되었다. 이 중 제3관문을 지나면 경상북도이다. 추풍...
-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 역사. 조선시대 충주는 1395년(태조 4) 지방제도가 개편된 후 충청감영의 소재지이면서 목(牧)으로서 대원(大原)·예성(蘂城)으로 불렸다. 관내의 호수는 1,871호이며, 인구는 7,452명에 이르고, 시위군 440명과 선군(船軍) 465명이 있는 대읍이었다. 1458년(세조 4)에 충주진(忠州鎭)이 설...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의병장.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백기(白旗). 개국공신 조인옥(趙仁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된 조일(趙逸)이다. 충주 출신의 조웅은 1591년(선조 24) 조헌(趙憲)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강(趙綱)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나...
-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사법·행정·군사적 권한을 지닌 종2품 관직. 조선 초기에는 일반 행정과 군정이 구별되어 있었으나, 태종 이후 감사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를 겸하였다. 또한 감영 소재지의 부윤(府尹)이나 목사(牧使)의 직책까지도 겸하게 됨으로써 그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도의 행정, 사법, 군사의 전반을 통괄하고 관할구역 내의 여러 수령을 감독하는 방대한 권한을...
-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행해진 향촌 자치 규약. 충주 지역에서는 일찍이 향약이 실시되었으나, 전란의 피해가 심해 다른 지방과 같은 향약절목(鄕約節目)이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그러나 『중종실록(中宗實錄)』에 기록된 한충(韓忠)의 말에 “충청도의 향약 거행이 다른 도보다 낫고 충주가 도내에서도 제일”이라고 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충주는 향약을 보급하기 시...
-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경량(景亮), 호는 한천(寒泉). 아버지는 생원(生員) 허초(許礎)이고 어머니는 임하임씨(臨河林氏)이다. 숙종조 영의정을 지낸 허적의 할아버지이다. 선조 때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등용된 뒤 1587년(선조 20) 선공감 봉사(奉事)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왕을 따라 호종했으며...
-
조선시대 호적대장에 기재된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호와 인구 수. 호구는 사전적 의미로 호적대장에 기재된 집과 식구의 수를 말한다. 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국역 복무자와 공부(貢賦) 부담자를 확정짓고 대민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는 정확한 호적대장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시대의 호적대장은 조선 정부가 국가정책 수행이라는 특정한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