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42 |
---|---|
한자 | 武王 |
이칭/별칭 | 부여장(扶餘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삼국 시대 백제의 제30대 왕.
[가계]
무왕(武王)[?~641]의 성은 부여(扶餘)이며, 이름은 부여장(扶餘璋)이다. 백제 제29대 왕인 법왕(法王)[재위 599~600]의 아들이며, 제30대 의자왕(義慈王)[재위 641~660]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금마(金馬)[현 전라북도 익산시]의 연못에 사는 용과 가난한 어머니 사이에서 무왕이 태어났으며, 마를 캐어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름이 서동(薯童)이었는데 꾀를 내어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를 데려와 혼인하고 나중에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활동 사항]
무왕은 600년 5월에 법왕이 사망하자 백제의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호방하며 걸출하였다고 한다. 602년부터 636년까지 10여 차례 신라를 공격하며 영토를 넓히려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607년에는 중국 수(隋)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양제(煬帝)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몇 차례 두 나라의 사신이 오고간 뒤 612년에 수나라가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자,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고구려와도 몰래 내통하였다고 한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하자 무왕은 621년부터 조공하였으며, 624년에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에 책봉되었다. 627년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당나라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
무왕은 630년 왕권 강화책의 일원으로 대대적으로 사비(泗沘)의 궁궐을 중수하였고, 634년에는 아버지 법왕이 사망하기 직전에 짓기 시작한 왕흥사(王興寺)를 준공하였다. 백마강 가에 지은 왕흥사는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는데, 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예불을 올렸다고 한다.
무왕은 재위 후반기에 미륵사(彌勒寺)·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고 다수의 건물을 짓는 등 익산 지역을 중시하였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枳慕蜜) 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정사(精舍)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익산이 “본래 백제의 금마지(金馬只)로서 무강왕(武康王) 때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고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무왕은 641년 3월 사망하였다.
[묘소]
무왕의 능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쌍릉은 대왕묘와 소왕묘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고려 시대에 도굴된 적이 있다고 전하며 1917년과 2017년에 각각 대왕묘를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대왕묘는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백제 왕릉원의 석실묘와 구조가 같았으며, 내부에서 60대로 추정되는 남자 유골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