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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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威德王 |
이칭/별칭 | 부여창(扶餘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백제 제27대 왕.
[가계]
위덕왕(威德王)[?~598]의 성은 부여(扶餘)이고, 이름은 부여창(扶餘昌)이다. 백제 제26대 왕인 성왕[재위 523~554]의 아들이고, 제28대 혜왕(惠王)[재위 598~599]의 형이다.
[활동 사항]
위덕왕은 554년 7월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뒤를 이어 백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버지 성왕의 정책을 대체로 이어받아 전쟁과 외교에 적극적이었으며, 중국의 남조(南朝) 중심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북조와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재빨리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는 기민성을 발휘하였다. 불교 사찰을 많이 건립하는 등 불교 진흥에도 힘썼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성왕이 죽은 뒤 왕자 창이 왕위를 이어 받지 않고 출가 수도하려 하였으나 원로 귀족들이 설득하여 마침내 즉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두고 관산성 패전의 영향으로 위덕왕 대에 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어 귀족 중심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하였으나, 577년에 건립한 왕흥사(王興寺)의 사리기 명문 등을 보면 늦어도 왕흥사 건립 단계에는 왕권이 회복되어 위덕왕이 국정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은 재위 14년(567)에 중국 남조의 진(陳)나라로 사신을 보낸 것을 비롯해 사망할 때까지 약 30여 년 동안 13회에 걸쳐 진·남제(南齊)·북제(北齊)·북주(北周)·수 등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중국 남북조의 여러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어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위기 극복을 도모한 것인데, 위덕왕이 여러 중국 왕조와 적극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관산성 패전 이래 크게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위덕왕은 598년 12월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