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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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王 |
이칭/별칭 | 부여명(扶餘明),부여명농(扶餘明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백제 제26대 왕.
[가계]
성왕(聖王)[?~554]의 성은 부여(扶餘)이고, 이름은 부여명농(扶餘明穠) 또는 부여명(扶餘明)이다.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의 아들이며, 제27대 위덕왕(威德王)[재위 554~598]과 제28대 혜왕(惠王)[재위 598~599]의 아버지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성왕·명왕(明王)·성명왕(聖明王)으로 기재되어 있다.
[활동 사항]
성왕은 523년 5월에 무령왕이 죽자 백제의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한다. 성왕은 재위 16년이 되던 538년 사비(泗沘)[현 충청남도 부여군]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 사비 천도는 부여계 왕실의 역사 정체성을 확립하고 위상을 높이는 일이었기에 진씨(眞氏)·해씨(解氏) 등 남래 귀족들은 물론이고 사씨(沙氏)·목씨(木氏)·연씨(燕氏) 등 신진 정치 세력의 지지 및 협조도 얻을 수 있었다.
성왕은 사비 천도 이후 도성 안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계절별로 제사를 지냈으며, 왕도에서 3산(山)과 지방에서 5악(嶽)을 정해 정기적으로 산신들을 숭배하고 하늘과 오제(五帝)에게 제사 지내는 등 국가 의례를 정비하였다. 또한 웅진의 대통사(大通寺)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창건하고 서적을 간행하는 등 불교 진흥에도 힘을 쏟았다.
성왕은 내관(內官) 12부(部)와 외관(外官) 10부의 22부사(部司)를 설치하여 국가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관료들의 위계를 16관등제로 일원화하였다. 사비성 내부를 5부(部) 5항(巷)으로 구획하였고, 지방 행정 조직을 방(方)-군(郡)-성(城)으로 편제하고 군사 거점으로서 5방(方)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체제 정비를 통하여 성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성왕의 외교 정책은 무령왕 대와 같이 중국 남조 양(梁)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왜(倭)와의 교류 및 연대를 돈독히 하였으며, 가야·신라와의 갈등을 줄여 견인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특히, 가야 지역을 침략하며 영토를 넓히는 신라에 대해서는 직접 충돌하기보다 가야 제국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는데, 541년과 544년 사비에서 개최한 대책 회의에는 대가야(大加耶)·안라(安羅)·다라(多羅)·졸마(卒麻)·산반해(散半奚)·사이기(斯二岐)·자타(子他)·구차(久嗟) 등 가야 여러 나라의 지배자들과 왜(倭)의 사신이 참석하였다.
551년 성왕은 신라 진흥왕(眞興王)과 힘을 합쳐 한강 유역의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 6군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았다. 553년 7월 신라가 백제군을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마저 차지하자 성왕은 신라 침공을 결심하고 554년 1월 왜에 사신을 보내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554년 6월 왜왕이 파견한 군대가 도착하자 성왕은 가야군과 함께 연합군을 편성한 뒤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백제 연합군을 왕자 창(昌)[위덕왕]이 지휘하며 신라 관산성(管山城)[충청북도 옥천군]을 공격하였는데, 554년 7월 성왕은 50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뒤늦게 합류하려다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