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03 |
---|---|
한자 | 烽燧 |
영어공식명칭 | Signal-fir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고산리|송산면 무수리|정미면 수당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학로 |
[정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 있던 불과 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 시대의 통신 제도.
[봉수 제도의 목적]
봉수(烽燧)는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봉(烽)[불]과 수(燧)[연기]로 신호를 보내는 것은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 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전근대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적으로 단축되었고,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하여 지방의 급변하는 민정 상황이나 국경 지방의 적의 동태를 상급 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했다. 봉수제는 일반 국민들의 개인적인 의사 표시나 서신을 전달할 수는 없는 것으로,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 기능(傳報機能)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의 봉수제]
봉수제는 고려 시대의 것을 이어받았지만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통신 수단이 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봉수제가 강화되었는데 조선 시대에는 태종 때에 이르러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음을 기록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다. 1406년(태종 6) 12월에 자주인(慈州人) 조수일(曺守一) 등을 거제현(巨濟縣) 봉졸로 장배(杖配)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1408년 1월에는 연해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만호(萬戶)와 천호(千戶) 등을 단속할 목적으로 해도찰방(海道察訪)을 하삼도(下三道)에 보내면서 봉화로써 해상을 간망함은 군사상 긴요하므로 만약 이를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엄중히 다루라고 지시한 바가 있다.
봉수는 경비가 덜 들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적정(敵情)을 오직 5거의 방법으로만 전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전달할 수 없어 군령(軍令)의 시달이 어렵고 또한 비와 구름·안개로 인한 판단 곤란과 중도 단절 등의 결점이 있었다. 반면에 파발은 경비가 많이 소모되고 봉수보다는 전달 속도가 늦은 결점이 있으나 문서로써 전달되기 때문에 보안 유지는 물론 적의 병력수·장비·이동 상황 그리고 아군의 피해 상황 등을 상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당진의 봉수지]
당진시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터로는 세 곳이 있다. 당진현 관할의 고산 봉수(高山烽燧)는 고대면 서부와 대호지면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는 고산[164m]에 있다.
면천군 관할의 창택산 봉수(倉宅山烽燧)는 송산면 삼월리와 도문리에 걸쳐있는 높이 104m의 창택산에 있다. 해미현 관할의 안국산 봉수(安國山烽燧)는 정미면 수당리 안국산에 있다. 안국산 봉수는 주산 봉수와 연결하여 북으로 고산 봉수에 연결하였고, 고산 봉수는 동으로 면천 창택산 봉수에 이어졌으며, 창택산 봉수는 서쪽으로 당진현의 고산 봉수와 북쪽으로는 경기도 양성현의 괴대길곶 봉수, 즉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에 있는 봉수와 연결되었다.
당진은 해안에 면해 있어 외적의 침입에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조건으로 봉수는 중요한 통신 수단의 역할을 하였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1894년 청일 전쟁을 들 수 있다. 당진 난지도 앞바다에서 풍도 해전이 벌어졌을때, 난지도에서 전황을 살피고 이를 봉수로 삼봉 고산 면천군으로 소식을 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봉수제는 1894년(고종 31) 우정총국(郵征總局)의 설립으로 인한 새로운 통신 전달의 체제가 수립되면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