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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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연두(年頭),세수(歲首),원단(元旦),민속의 날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집필자 | 조종안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음력 1월 1일에 행해지는 세시 풍속.
[개설]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설날이라 하며 한 해의 첫날을 뜻한다고 해서 연두(年頭), 세수(歲首), 원단(元旦) 등으로 불리었다. 설날에 남녀 모두는 설빔을 갈아입고, 떡국·수정과·강정 등의 세찬을 만들어 차례 상에 올린 다음,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며 차례 상에 올렸던 음식으로 식구 모두는 음복한다.
[연원 및 변천]
중국 역사서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삼국 시대[신라·고구려·백제] 모두 정월(正月)을 각별한 달로 여겼으며, 신라인들은 원일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일월신(日月神)을 배례한다고 적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설날[元正]은 한식·단오·추석·동지 등과 함께 9대 풍속절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동국 세시기(東國歲時記)』, 『경도 잡지(京都雜誌)』와 『열양 세시기(洌陽歲時記)』 등이 비록 한성[지금의 서울] 지역에 관한 세시기를 썼다고 하지만, 위 책에 나오는 설에 관한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의 설 관련 풍속이 『형초 세시기(荊楚歲時記)』에 나오는 중국의 설 풍속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 영향 받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설날은 태양력 사용이 선포되던 1896년(고종 33)에 공식 폐지된 후 100년 가까이 파란곡절을 겪는다. 일제 강점기 일제의 조선 전통 문화 말살 정책으로 수난을 당했고, 1949년 정부가 공휴일 발표 후에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사 정부가 이중 과세라 하여 폐지하려 했다.
이후 1985년 총선을 앞두고 ‘민속의 날’로 정했다가 1989년 2월 3일 제 이름 ‘설날’을 되찾았다. 온갖 박해와 시련을 견뎌내고 1989년 부활한 설날은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9년 신정 휴일이 하루로 줄어들면서 명실상부한 민족 최대의 명절로 복권되었다.
[절차]
음력 1월 1일 설에는 원근에 흩어져 살고 있던 자손들이 장손 집에 모여 조상님께 차례를 지낸 후, 새로 마련한 설빔으로 갈아입고 멀리 살고 있는 일가친지에게 찾아가 세배를 드린다. 이때 세배를 받는 어른들이 주는 돈을 세뱃돈이라고 한다. 근래에는 세배가 매우 간소화되었고, 연하장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설의 세찬으로는 떡국을 끓여 먹었다. 설 새벽에는 복조리 장수에게 한 해 쓸 조리를 사거나, 야광귀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신발을 방안에 들여 놓고 잠을 자기도 했다.
새해의 첫날인 1월 1일이 모충일(毛蟲日)[有毛日], 즉 진일(辰日)[용의 날], 사일(巳日)[뱀의 날]을 제외한 자일(子日)[쥐의 날], 축일(丑日)[소의 날], 인일(寅日)[호랑이 날] 등 ‘털 있는 짐승의 날’이어야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보았다. 한편 장사하는 집에서는 모충일 중에서도 인일에 한 해의 장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설날에는 설빔을 곱게 차려입고 차례를 지냈다.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 자식들은 부모의 장수와 다복을 기원하며 세배를 올렸다. 부모는 건강을 빌어주거나 덕담(德談)을 건넸고, 돈을 많이 벌라는 뜻으로 세뱃돈을 주었다. 요즘에는 현금 대신 문화 상품권이나 도서 상품권을 주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설날 아침에 집안 행사가 끝나면 일가친척과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녔으며 연날리기, 팽이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널뛰기, 투호놀이, 제기차기, 윷놀이, 고누놀이, 칠교놀이 등을 했다. 이러한 놀이는 봄까지 이어졌으며 딱지치기, 구슬치기, 제기차기, 고누놀이 등은 1년 내내 즐겼다.
어른들은 풍물패[풍장꾼]를 조직, 마을 곳곳을 돌며 악귀를 쫓아냈다. 지신밟기, 고싸움놀이, 강강술래 등 지방에 따라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는데, 이러한 놀이는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고, 복을 빌거나, 건강을 소망하는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