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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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俗 |
영어공식명칭 | folklore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영하,서종원 |
[정의]
경기도 성남시에서 생활, 신앙, 풍속, 전설 등 민간에 이어져온 습속.
[개설]
오늘날의 성남시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자연마을과 개발도시가 혼재한다. 특히 1970년대 광주대단지 개발과 1990년대 분당신도시 개발로 그 영역이 더욱 확장되어 대부분의 주거지역이 공동주택이거나 서구식 구조를 띤다. 그로 인해 탄천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 마을 같은 형태는 극소수만이 남았다. 수정구의 심곡, 고등, 시흥, 사송, 안골 등과 분당구의 판교, 안말, 운중, 금곡 등의 마을은 조선 후기 이래 꾸준히 변모해 온 자연마을이었지만 이 또한 점점 사라져 가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성남 시민들은 아파트나 연립주택과 같은 도시형 공동주택에 거주한다. 이렇듯 주생활은 서구식으로 변모해왔지만 식생활은 전통 한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비록 공산품을 구입하는 비율이 80% 이상이지만, 외식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상적으로 한국 음식을 먹는다. 삶과 주거 형태가 변화하면서 성주신령, 조왕신령, 터주신령과 같은 민간 신앙은 거의 사라졌다. 복식에서 한복과 전통 의복은 명절 때나 입는 예복이 되었다. 한옥에 비해 실내 온도가 높은 편인 도시형 공동주택에 살면서 집에서 입는 옷과 외출복은 구분해서 입는다.
한 해의 24절기와 관련된 세시풍속의 경우 시민들은 설날과 추석을 중요한 전통 명절로 여긴다. 정월대보름 관련된 세시풍속도 남아 있는데 판교 너더리마을 회화나무 고사와 줄다리기 행사는 아직도 열린다. 하지만 옛날처럼 풍농 기원의 의미는 사라지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이는 마을 잔치로 행해진다. 정월대보름 윷놀이는 노인복지관 등에서 열리며, 경로 잔치도 매년 정기적으로 열린다. 칠월 복중에는 삼계탕 등의 보양식을 먹는 풍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옛날처럼 개고기는 먹지 않는 추세이다. 시민들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크리스마스 행사를 전통 세시풍속보다 더 친근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의례 역시 많이 변화되었다. 관혼상제의 예법에 따라 행해지던 돌, 혼인, 환갑, 상장례 등의 평생의례는 점차 그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다. 혼인은 주로 예식장에서 치르며, 신혼살림은 공동주택에 차린다. 출산은 대부분 병원에서 이루어지며, 돌잔치도 서구식 연회장에서 치른다. 수명이 급격히 연장되면서 환갑 잔치는 치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상장례 역시 병원에서 치른다. 이러한 외형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제 의례 내용을 살펴보면 전래된 예법에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다.
오늘날 성남 지역은 도시형으로 바뀐 주거와 도시적 환경에 둘러싸여 고유의 민속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습성, 가족관계, 가정의례, 지역 곳곳의 자취를 살펴보면 민속이 지닌 의미와 내용이 지속적으로 유지 전승되고 있다. 성남시민은 원주민이 적고 대부분 외지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각기 본래 고향에서 행하던 민속과 성남 고유의 민속이 섞이는 양상으로 민속이 만들어지고 있다.
[생활민속]
성남시의 전통적인 살림집 형태는 경기 남부지역의 일반적인 유형인 ‘ㄱ자’ 형식이며 경제 형편에 따라 ‘튼 ㅁ자’ 형태로 확장되기도 했다. 비록 일부이지만 성남시에 남아 있는 전통적인 집들은 핵가족화와 도시화로 인해 사라지거나 창고나 빈 공간으로 바뀐 경우가 많다. 현재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전통 가옥은 분당구 개발 이전까지 한산 이씨 집안이 대대로 살았던 수내동 가옥을 들 수 있다. 분당구 중앙공원 안에 있는 이 가옥은 1989년 12월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성남 지역 가옥 형태의 변화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광주대단지 개발, 분당신도시 건설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판교 지역은 고속도로에서 마을 외관이 보인다고 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의 함석지붕 혹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대적인 지붕 개량을 했다. 아울러 이주가 불가피한 주민들과 서울에 거주하는 공무원을 중심으로 일명 ‘개나리마을’이라는 취락 구조 개선 시범마을을 만들었다. 구릉으로 둘러싸인 8천여 평의 개나리마을은 집 구조를 25평짜리 2층 양옥과 정원, 그리고 10평짜리 창고로 설계했다. 광주대단지 개발도 수정구 일대의 가옥 형태를 바꾸었다. 1969년에 형성되기 시작한 광주대단지의 천막 판자촌은 이주민들이 7평 땅에 천막을 치고 판자로 지붕을 이은 집단 거주지이다. 광주대단지 개발로 이들 천막집들은 시멘트로 지은 도시형 주택으로 변모했다. 1989년에 시작된 분당신도시 개발은 성남시의 도시화를 가속화했다. 서울 인구의 수도권 이전을 위해 설계된 분당 지역에 대단위 아파트 조성이라는 목표가 주어졌다. 540여 만 평에 10만 6천호의 주택을 짓는 분당신도시 개발은 성남시에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형성시켰다. 이후 중원구와 수정구 일대에도 아파트와 함께 연립주택이 속속 들어서서 성남시민의 주생활은 거의 밀폐형 공동주택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주생활의 변화는 의생활을 변화시키는 촉매제였다. 집에서 입는 일상복의 경우, 전통 가옥에서는 주로 두꺼운 솜옷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밀폐형 공동주택에서는 난방의 발달로 단출한 옷으로 바뀌었다. 특히 가족 구성이 핵가족으로 변하면서 의례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간편한 옷이 생활화되었다. 서구식 간편복이 압도하면서 도시인들에게 한복은 멀어지게 되었다. 잔치나 명절이 아니면 한복을 입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1970년대 이후 한복은 의례복으로 그 기능이 변화했다. 그러나 연령에 따라 전통 의복을 갖추고 일상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1980년대 들어서 시민들은 더는 집에서 옷을 만들지 않고 기성복을 사 입었다.
이렇듯 주생활과 의생활은 급격히 서구화되었지만 식생활은 여전히 전통 한국 음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지속되었다. 단지 음식 조리에서 과거 농촌경제 사회에서 보여주었던 어머니-딸 혹은 시어머니-며느리의 기술 전승은 지속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식사 준비를 여성이 도맡아 하지 않고 가족이 나누어 함께 한다. 집이 아파트 구조로 변화하면서 장독이 사라졌지만 시중에 판매되는 간장, 된장, 고추장과 같은 발효식품을 이용한 한국 음식은 계속 대표적인 먹거리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전통 음식인 김치도 사서 먹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방송국의 음식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영상으로 음식 조리 정보를 이용해 식생활에 적용하는 큰 흐름이 생겼다.
옛날 민간에 전해진 조왕, 터주신령, 철륭신령 등의 가정신령은 아파트 주거 공간으로 바뀌면서 거의 사라졌다. 다만 음식과 관련된 몇 가지 속신이 있다. 예를 들어 시험이 있는 날 미역국을 먹으면 낙방한다는 것과 엿을 먹으면 시험에 붙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시험과 오늘날 시험이 있다는 현실이 같기 때문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돌, 생일 등과 같은 가족 기념일은 그 의미가 특별히 강조된다. 돌과 생일에는 떡보다는 케이크가 의례음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미역국은 변함없이 의례음식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집에서 큰상을 차리는 일이 적어 교자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생활방식이 서구형으로 많이 변화했지만 일상적인 식사는 여전히 전통 한국 음식을 선호한다. 외식을 할 때도 해물탕, 순대국과 같이 한국 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다. 주거나 의생활의 서구화와 빵을 즐겨 먹고 커피, 양주, 포도주와 같은 음료와 술을 마시는 서구형의 식생활 모습도 있으나 식생활에 있어 한국인의 삶은 여전히 한국형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남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 특별히 존재하지는 않지만 1968년 이후 서울에서 이주한 저소득층이 성남에 정착하면서 먹었던 돼지껍질구이나 돼지꼬리구이 등을 들 수는 있다. 이들 음식이 성남의 향토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역적인 음식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성남시 일대에는 외식산업이 상당히 발달했다. 시 중심가는 물론이고, 분당구의 판교동, 궁내동, 운중동 일대는 다양한 음식점이 성행하고 있다. 주된 메뉴는 한식에서 양식까지 다양하다. 그 가운데 수정구 단대동의 ‘닭죽촌’과 중원구 여수동의 ‘갈매기살촌’은 서울 강남 시민들이 단골로 찾는 유명한 성남의 음식이다.
[세시풍속]
성남시는 산업화 이후 이주민이 대거 유입되고 신도시 개발로 변화가 극심하여 개발 이전의 세시풍속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1998년과 2003년 수정구 금토동에서 조사된 세시풍속을 통해서 성남의 풍속을 가름해 볼 수 있다. 자연마을에서는 정월 열나흘 오곡밥 먹기, 정월대보름 부럼 깨물기와 더위팔기, 정월대보름 윷놀이, 정월고사와 장 담그기가 있었고 쥐불놀이는 서울공항이 생기면서 농토가 줄어들어 사라졌다. 음력 2월 나이떡 빚기와 콩 볶아 먹기, 삼월 한식 성묘하기, 사월 초파일 절에 가서 연등 달기와 탑돌이, 오월 단오에는 약쑥 베기 음력 6월에 밭고사 지내기, 음력 7월에는 칠석 고사와 백중 씨름대회가 있었으며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을 먹었다. 음력 8월 추석에는 토란국을 먹으며 차례와 성묘하기, 음력 10월은 마을 제사나 상달 고사, 시묘 제사를 지냈으며 김장을 한다. 음력 11월 동지 때는 팥죽을 끓여 먹는 집은 여전히 많지만, 이웃끼리 나누어 먹는다거나 대문에 뿌리는 등의 전래 민속 행위는 하지 않는다. 음력 12월에는 묵은세배와 대청소를 한다.
[평생의례]
성남에서는 아직도 관혼상제를 근거로 평생의례를 치른다. 혼인을 통해 남녀가 부부가 되고, 아이를 출산하면 돌잔치를 치르고, 생일, 혼인, 환갑, 사망을 맞으면 전통 의례를 행한다.
혼인 사례는 성남시 수정구에 살고 있는 최*희[1979년생, 성남 출생] 씨의 경우이다. 최씨는 2남 2녀 중 장녀이며, 그녀의 남편 배*남[1974년생, 부산 출생] 씨는 2남의 장남이다. 두 사람은 대학 다닐 때 친구의 소개로 만나 5년 동안 연애를 한 후 2002년에 혼인을 했다. 지금 이 부부는 성남시청 사거리에서 핸드폰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혼인 약속을 한 후 양가 부모가 상견례를 했다. 이후 남편은 혼인식을 며칠 앞둔 날, 시어머니가 직접 빨간 보자기에 싸준 사주단자를 들고 최씨 집으로 왔다. 사주단자를 받은 친정아버지가 결혼식 날짜를 정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예식장 예약이 가능한 날짜에 맞추었다. 함은 혼례식 전날에 신랑 친구들이 가지고 왔다. 남편의 친구 중 이미 혼인을 하고 첫아들을 낳은 친구가 얼굴에 오징어를 쓰고 함을 메었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된 함 장사는 최씨의 친구들이 나서서 돈을 깔고 설득하여 집으로 들어왔다. 함진애비는 함을 친정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친정아버지는 시루 위에 함을 놓았다. 떡은 안 했지만 시루는 있어야 한다고 하여 친정어머니가 옆집에서 빌려왔다. 그 후 안방에서 저녁을 먹고 신랑 친구들과 신부 친구들은 성남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놀았다.
혼인식을 하기 전에 신혼집을 장만했다. 신혼집은 남편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최씨가 친정 동네에 살고 싶다고 하여 친정과 같은 아파트에 전세를 얻었다. 그리고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는 최씨와 남편이 같이 돌아다니면서 골랐다. 최씨 부부의 혼인식은 2002년 5월 11일 남한산성에 있는 궁전 웨딩홀에서 거행되었다. 혼인식이 끝난 후 하객들을 위한 피로연은 웨딩홀 식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신랑과 신부는 양가 부모에게 폐백을 올렸다. 혼인식 때 식장에서 입은 신랑, 신부 옷은 연미복과 웨딩드레스였으며, 폐백 장소에서는 사모관대와 빨간색의 치마, 저고리였다. 폐백을 마친 후 신랑, 신부와 양가 부모는 피로연 장소로 가서 인사를 했다. 그 후 부부는 신혼여행을 가기 위하여 공항으로 갔다. 공항으로 갈 때 신랑 친구의 차를 이용했는데, 승용차 뒤에 깡통과 여러 가지 장식을 달았다. 신혼여행은 여행사를 통해서 단체 관광 상품을 택했고, 장소는 괌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먼저 신랑 집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최씨의 시어머니가 아파트 현관 앞에 물을 떠 놓고 절을 하라고 하여 절을 하고 집안에 들어가 인사를 했다. 그날 저녁은 최씨의 시댁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에 친정으로 갔다. 친정에 갈 때 최씨의 시어머니는 떡과 몇 가지의 음식을 함께 들여보냈다. 친정에 가자 문 앞에 동생들의 친구와 남편의 친구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고 저녁이니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하여 신랑 매달기는 하지 않았다. 2022년 현재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함 장사는 이제 보기 힘들며 친정에서 신랑 매달기 역시 거의 하지 않는다. 결혼식 역시 예식장에서 하는 경우가 많으나 작은 결혼식이나 전통혼례 등 다양한 형태의 결혼식이 행해지기도 한다. 신혼여행을 갈 때도 깡통을 매달고 가지 않으며 간단하게 차에 치장을 하기도 한다. 신혼여행은 다양한 곳으로 가며 해외의 다양한 곳을 가는 경우와 국내에서 특색 있는 신혼여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상장례 사례는 분당구 판교동에 세거하는 연안 이씨 문중에서 1997년에 행한 것이다. 분당에 있는 종합병원 영안실에서 치렀다. 어른의 임종은 병원 침상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맞았고, 유족들은 곡을 했다. 의사가 사망 진단을 내리고 유해는 안치실로 이송되었다. 유족들은 영안실을 계약하고 수의, 관, 전상, 조문객을 위한 음식 등을 영안실에서 결정했다. 습(襲), 소렴(小殮), 대렴(大斂)은 병원 영안실의 안치실에서 염사를 불러서 했다. 염사는 3인 1조로 구성되며, 얼굴→팔→상체→하체의 순서로 시신을 깨끗하게 닦고 수의를 입혔다. 수의를 입히면 맏상제가 망자의 입에 쌀을 넣는다. 습이 끝나면 몸 전체를 삼베로 묶는 소렴과 몸 전체에 대렴포를 묶고 관 안에 한지를 깔고 양쪽에서 유해를 들어 관에 넣은 후 관의 빈 공간에 심을 뺀 두루마리 휴지를 넣어 보공한다. 보공이 완료되면 관 뚜껑을 덮고 영구를 묶은 뒤 준비한 명정을 덮은 다음 보관실에 넣는다. 연안 이씨 문중에서는 염을 하는 동안 문중 어른 한 분이 사용하게 될 축문을 적었다. 영안실에서 구입한 상복, 삼베 두루마기, 두건, 행전, 상장을 사용했다. 성복이 완료되면 바로 성복제를 지내고 이후 아침, 저녁으로 전(奠)을 올렸다. 병원 영안실에는 별도로 장례식장을 두었다. 영안실 측에서 미리 정해둔 식단 2~3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 문상객에게는 육개장을 주 메뉴로 하여 떡과 과일, 생선부침과 나물, 김치 등의 찬을 대접했다. 장례는 영구차를 불러 문중 선산에서 행했다.
오늘날 시민들은 평생의례의 주요 행사를 전문업체에 맡겨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민들이 관혼상제의 전통 의례를 선조들처럼 숙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보통 돌잔치도 뷔페식당에서 치르지만 최근 경향은 직계가족만 모여 조용히 치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통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전통 방식의 성인식은 하지 않으며,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장례는 장례식장에서 하고 매장보다 화장(火葬)을 많이 선택한다. 다만 기제사와 시묘제의 경우만이 여전히 가족이 주도하여 행하고 있을 뿐이다.
[민속신앙]
도시형 주거 공간으로 바뀌면서 성주신령, 조왕신령, 터주신령 등과 같은 가정신령을 집안에서 모시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다. 특히 기독교도 가정에서는 가정신령을 미신으로 여긴다. 하지만 연세가 많은 분들은 가정신령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경우 가정신령에 대한 믿음보다는 과거부터 해오던 풍습이기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가정신령을 모시지 않지만, 음력 10월에 성주고사를 지내는 집도 있다. 이 경우에도 팥 시루떡과 북어, 막걸리를 준비하여 마루에서 간단한 치성을 드린다.
성남의 무속은 세습무 계통이며, 굿은 주로 광주굿과 닮아 있었다. 반면 굿의 형식은 서울굿과 닮은 양상을 보인다. 특히 성남 무속은 선굿과 앉은굿 두 유형이 동시에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가령 선굿으로는 서울굿 계통과 경기도굿 계통, 그리고 두 가지 굿이 혼합된 형태를 보인다. 다른 하나는 충청도에서 주로 행해지는 앉은굿이다. 주로 충청도에서 성남으로 이주해온 법사 계통의 남자 만신이 이 굿을 한다. 마지막으로 선굿과 앉은굿을 모두 행하는 만신도 있다. 마을굿은 한때 몇 곳에서 행해진 적이 있었다. 가령 중원구 은행동 대동굿은 만신 이광수의 노력으로 1993년과 1995년에 명맥을 이어 행해진 적이 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현재 이런 전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의례 규모 또한 축소되었다.
마을신앙 으로는 등자리산신제가 있는데, 음력11월1일에 행해진다. 상적동3통[옛골]산신제는 10월 초에 지내는데 5월 초 철쭉제를 할 때 간단히 산신제를 지내고 행사를 시작한다. 심곡동에서도 산신제를 지내는데 음력 7월 초하루에 지낸다.
[민속놀이]
성남에 남아 있는 민속놀이 중에는 성남의 고유한 전통을 담고 있는 것은 적고. 일반적인 민속놀이가 성남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성남 지방에서 이루어졌던 민속놀이 중 판교 쌍용거줄다리기가 있다. 일제 강점기 1929년 3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광주색전’이라 하여 줄다리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낙생면과 돌마면이 광주에 속해 있었으므로 성남 지역에 줄다리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줄다리기 형태와 같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판교에서는 판교 쌍용거줄다리기를 재연해 줄다리기 놀이와 마을 축제로 활용하고 있다.
이무술집터다지는소리는 분당구 이매동의 옛 이름인 이무술에서 집터 다지는 소리가 특색있어 전해지고 있다.
성남의 두레놀이 중 대표적인 것이 ‘오리뜰 농악’이라는 두레놀이이다. 오리뜰은 과거 광주군에 속해 있던 낙생면 구미리의 옛 이름이다. 사라질 뻔했던 오리뜰 농악은 복원되어 오늘날 재현 공연이 열린다.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재도듬놀이 혹은 재도드미라는 상여놀이가 성남 지역에서 행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