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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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竺山佛影寺記 |
영어의미역 | Documentary of Buryeongsa Temple in Cheonchuksan Mountain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하원리 122[불영사길 4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심현용 |
성격 | 고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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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유백유|황동명 |
용도 | 사찰의 유래에 관한 기록 |
발급일시 | 1810년(순조 10)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하원리 불영사의 창건 설화를 알려주는 기문(記文).
[개설]
불영사의 창건에 관한 기문은 1370년(공민왕 19)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유백유(柳伯濡)가 썼다고 「천축산 불영사기」에 전한다. 유백유는 기록의 근거를 신라 옛 비석으로 밝히고 있다. 유백유의 기록은 불영사와 관련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불영사의 창건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은 1611년 황동명(黃東溟)의 「천축산 불영사기」의 첫머리에 실려 있다. 불영사에는 1810년(순조 10)에 만든 45.2×31.5㎝ 크기의 필사본 「천축산 불영사기」가 얼마 전까지 전해져 왔다고 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으며, 다만 그 내용만 전한다.
[구성/내용]
“신라 옛 비석에 의하면, 당나라 영휘 2년(651)에 의상법사가 동경[현 경주]에서 해변을 따라 단하동[현재 불영사가 있는 곳]에 들어와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감탄하기를 ‘서역 천축산을 바다를 건너 만들어 놓은 듯 하며, 또한 산골짜기의 물 위에는 다섯 부처님의 영상이 비치니 더욱 기이하구나.’라고 하였다.
하류로 내려와 금탑봉에 올라보니 그 아래에 독룡이 있는 못이 있는데 의상법사가 용에게 설법하여 사찰 지을 땅을 베풀기를 청하였으나 용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의상법사가 신통력 있는 주술을 강하게 부리자, 용이 갑자기 분을 발하여 산에 구멍을 내고 돌을 깨뜨리며 사라졌다.
의상법사는 즉시 사찰 건립을 위해 못을 메우고, 동편에 청련전 3칸과 무영탑 하나를 건립하였으며, 땅을 비보하는 뜻으로 ‘천축산 불영사(天竺山 佛影寺)’라 편액하였다. 의상법사가 의봉(儀鳳)[676~678] 초에 서산에 들어가 부석사, 각화사 등의 사찰을 창건하고 15년간 천하를 돌다가 어느 날 불영사로 돌아오는데 선사촌[현 울진군]에 이르자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온다[佛歸]’고 기뻐하였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불영사가 백암산 자락에 있으므로 ‘백암산 불귀사’라 속칭하게 되었다. 동편 삼각봉 아래 좌망대가 있고, 오룡대 남편에 향로봉·청라봉·종암봉이 있고, 서편에는 부용성·학소대, 북에는 금탑봉·의상대·원효굴·용혈사 등이 있었는데 모두 승경이었다.
의상법사가 9년을 머물렀으며, 원효법사 역시 유람하다가 두 법사 모두 ‘낙산의 참대비상(叅大悲像)을 인하여 금강산 마하연에 자리 잡았다’고 이른 곳이 바로 천축산 불영사이다. 의상법사는 처음으로 천축의 옛 이름으로 명칭하였으나, 백암산 불귀사라 한 것은 후인이 의상법사를 추모하여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다.
고로 산과 절이 함께 두 가지 이름이 있으니 지금 사람 대부분이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르는 것은 성스러운 뜻을 거스름이 심한 것이다. 화엄론에서는 의상법사가 과거 금산 보개여래의 후신이라 하였고, 원효법사는 현재 화엄의 대권보살의 지위에 있다. 이 두 성인이 거처하였으므로, 승려들에게 이름 그대로 귀하고 중하므로 지금의 사람들은 불가불 살펴보아야 하겠다. 홍무 3년(1370) 경술 8월 한림학사 유백유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