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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935
한자 佛影寺
영어음역 Buryeongsa
영어의미역 Buryeongsa Templ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불영사길 48[하원리 120]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황정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찰
건립연도/일시 651년(진덕여왕 5)연표보기
창건자 의상대사
전화 054-782-9281|054-783-5004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하원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 소속 사찰.

[개설]

불영사는 울진군 관내에서 가장 크고 유래가 깊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가 많아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건립경위 및 변천]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대사백암산 아래 단하동(丹霞洞)과 해봉(海峰)에 올라가서 북쪽을 보니 서역의 천축(天竺)과 같은 명산이 바라보여 산마루를 타고 그곳에 당도하니 산세의 묘함이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여 산 이름을 천축산이라고 하였다. 전면의 큰 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있으므로 주문으로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 절의 정서편(正西便) 산에 있는 부처님과 같은 바위의 그림자가 못에 항상 비춰져 절 이름을 다시 불영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 후 의상대사가 서산으로 가서 영주 부석사(浮石寺)와 봉화 각화사(覺華寺)를 창건하고 15년 동안 돌아다니다가 다시 불영사로 돌아오니 마을의 한 늙은 노인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다시 돌아오셨다”고 하여 백암산 불귀사(佛歸寺)라고도 하였다.

1397년(태조 6)에 화재로 소실되어 소진대사(小震大師)가 중건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고 1500년(연산군 6) 양성법사(養性法師)가 중건하여 선당(禪堂)으로 하였다.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어 1609년(광해군 1)에 성원법사(性元法師)가 재건하여 영산전(靈山殿)을 짓고 1701년(숙종 27)에 진성법사(眞性法師)가 수선하였다. 1721년(경종 1)에 천옥법사(天玉法師)가 재건하고 1899년(고종 36)에 설운대사(雪耘大師)가 중수하였다. 창건 당시의 유적으로는 무영탑과 대웅전 축대 밑의 돌거북이 있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몽천서원에 배향된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의 친필이다.

[현황]

현재 보존되고 있는 건물은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응진전(應眞殿)·응향각(凝香閣)·황화실(黃華室)·설선당(說禪堂)·법영루·칠성각·산신각 등 10동의 크고 작은 와가 건물들이 있는데 창건 당시의 건물은 하나도 없고 조선시대에 와서 중수한 것으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 또는 보수하여 왔으며 1977년에 절 입구 도로를 확장하였고 구동교(九動橋)·불영교(佛影橋)도 가설하였다. 절 서편에는 불영암이 높이 서 있고 동남쪽에는 구룡대가 반석이 되어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향로봉(香爐峰)이 높이 솟아 있어 금강산의 비로봉(毘盧峰)을 방불케 한다.

향로봉과 구룡대(九龍臺)의 반석 가운데로 흘러 떨어지는 16척 높이의 백운(白雲) 같은 폭포와 청신한 공기가 감도는 고요함 속의 묵직한 분위기는 사찰 고유의 장엄한 위용을 느끼게 한다. 산세 또한 태극과 같이 굽이쳐 흐르는 듯하므로 산태극(山太極)·수태극(水太極)이라 전하고 있다. 울창한 수림 속에 특이하게 의상대사가 심은 굴참나무는 수령이 1천 년이나 되고 그 외 소나무도 수백 년 생이 허다하다. 불영사 농토는 원래 전답이 수백 두락이었으나 해방 이후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현재는 밭이 2만 평, 논이 30두락으로 근근이 공양미에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련문화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와가 주심포 양식의 겹처마이다. 문은 교창(交窓) 무늬로 되어 있는데 삼존목불좌상이 봉안되었고 탱화 3점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목불좌상의 주존불은 좌고(坐高) 1.14m, 두고(頭高) 34㎝, 견폭(肩幅) 33㎝, 무릎 높이 20㎝이다. 좌우협시불도 동일한데 좌고 1.08m, 보관고(寶冠高) 23㎝, 두고 18.6㎝, 견폭 46㎝, 흉폭(胸幅) 25㎝, 무릎 폭 75㎝, 무릎 높이 20㎝이다. 탱화는 한 점은 1739년에 경상좌도 경주 북령 보현산 거조사 오주암에서 조성한 것이고, 나머지는 최근의 것이다.

극락전 내 삼존불의 주존불은 나발(螺髮)에 육계는 없다. 목에는 삼도(三道)의 구분이 뚜렷하며 군의대(裙衣帶)를 하였으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삼존불은 좌고 114.2㎝, 두고 34㎝, 견폭 52㎝, 흉폭 33㎝, 무릎 폭 82㎝, 무릎 높이 20㎝이다. 좌우협시보살(左右脇侍菩薩)은 좌고 108㎝, 보관고 23㎝, 두고 18.6㎝, 견폭 46㎝, 흉폭 25㎝, 무릎 폭 70㎝, 무릎 높이 17.8㎝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와옥의 다포집이다. 안에는 5점의 탱화가 있는데 모두 조선 말기의 것이다.

첫 번째 것은 1860년(철종 11), 두 번째 것은 1906년(광무 10), 세 번째 것은 1735년(영조 11), 네 번째 것은 1880년(고종 17), 다섯 번째 것은 묵기(墨記)가 없다. 또 금구(禁口) 1구가 있는데 지름 66.5㎝이고 네 곳에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대웅전 석축 밑에 두부(頭部)만 노출된 귀부(龜趺)가 양쪽에 있다.

대웅전 내 삼존불의 주존불은 나발에 육계가 있다. 통견(通肩)을 하고 삼도의 구분이 있으며 군의대를 하였다. 주존불은 좌고 99㎝, 두고 33㎝, 견폭 54㎝, 흉폭 41.5㎝, 무릎 폭 69㎝, 무릎 높이 14㎝이다. 좌우협시불은 보화(寶花) 새김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삼도가 있고 현수가 귀를 감아 내리고 있으며 연경을 잡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지붕의 양단을 길게 낸 것이 특징이다. 안에는 칠위(七位)의 신장대왕(神將大王) 즉, 일직사자(日直使者)·도시대왕(都市大王)·태산대왕(泰山大王)·송제대왕(宋帝大王)·초강대왕(楚江大王)·섭성대왕(燮成大王)·오도전륜대왕(五道轉倫大王) 등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신장대왕 어깨의 크기는 길이 2.09m, 폭 2.65m 정도이다.

배례석(拜禮石)은 삼층석탑 앞에 있다. 상면은 직사각형으로 치석(治石)하고 중앙에 팔판(八瓣)의 펼쳐진 연꽃 무늬를 양각하였다. 측면은 중앙을 좁혀서 마치 상(床)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부는 대강 치석하여 지하에 매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범종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와옥 맞배집으로 양쪽으로 풍판(風板)을 달았다. 현재는 접객실로 사용되며 좌측에 사모 지붕의 새로운 범종루를 만들었다.

양성당(養性堂)선사 부도는 전체 높이 185㎝의 석종형(石鍾形)이다. 이 부도는 대강 치석한 지대석 위에 팔판의 중복련(重伏蓮)을 장식한 기단 위에 일단을 각출(刻出)하였다. 기단은 높이 30㎝, 하경(下徑) 1.07m, 상경(上徑) 75㎝이다. 부도의 신석은 하면에 앙련(仰蓮), 견부(肩部)에 복련(覆蓮)을 만들었으나 매우 형식적이다.

사적비(事蹟碑)의 이수는 길이 46㎝, 폭 75.5㎝, 두께 59㎝이고 비신은 높이 155㎝, 폭 51.1㎝, 두께 23.8㎝이다. 비좌는 높이 19㎝, 폭 1.07m, 측면 폭 83㎝이다. 비좌는 2단의 모각(模刻)을 새겨 비를 꽂는 비공(碑孔)을 팠다. 이 비는 최근에 세운 것이나 이수와 비좌는 이전의 있던 것에 비신을 다시 만든 것이다.

산신각은 대웅전의 뒤쪽 산자락에 위치하며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 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목조 와즙(瓦葺)이다. 불영사 삼층석탑은 기단부·탑신부·상륜부가 모두 완존하고 있다. 탑은 2중 기단으로서 하층 기단 면석, 상층 기단 면석에 모두 탱주가 있고 두 우주를 각출하였으며 안상(眼象)은 없다. 옥신은 삼층이 모두 두 우주로 되어 있고 옥개는 4단 받침에 2단의 괴임이 있다. 추녀는 전각(轉角)에서 반곡(反曲)이 있고, 2층 탑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이 있는데 현재는 놓인 순서가 바뀌었다. 총 높이는 3.21m이다.

불영사의 석귀(石龜)는 대웅전 축대 밑에 두부만 노출되도록 중앙의 좌우에 배치하였다. 두부의 크기는 목까지 길이 65㎝, 경(徑)이 20㎝이다. 이와 같이 석귀가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것은 풍수설과 거북에 대한 세간의 믿음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양성당선사부도비의 규모는 전고(全高) 1.96m, 비신고(碑身高) 1.25m, 폭 58㎝, 두께 17㎝이다. 이수는 조선 통식(通式)으로 높이 33㎝, 폭 81㎝, 비좌는 장방형으로 치석하고 전면에 2조(條)의 방형(方形)을 음각하고 안쪽에는 안상을 각출하였다. 비는 폭 1.01m, 높이 35㎝ 위에 폭 57.3㎝, 높이 2㎝, 폭 76㎝, 높이 1.7㎝의 2단 괴임을 각출하여 그 위에 비공을 마련하고 비신을 꽂았다.

응진전(應眞殿)은 1578년(선조 11)에 건립한 건물로 불영사의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통일신라 말의 선종 구산문 가운데 하나인 도굴산파(盜掘山派)의 개조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초상화인 탱화를 봉안한 곳이다. 이 전각은 구조법도(構造法度)가 연구 자료로 되어 1973년 2월 문화재관리국 조사반장 정영호(鄭永鎬) 교수 일행에 의하여 85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전(應眞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와가 다포집으로 측면 지붕 마구리의 박곡 처리, 삿갓 천장, 부연이 없는 광창 등 특이한 형식이다. 이곳에는 탱화 1폭이 봉안되었는데 ‘광무십년 병오팔일…의상조사개분입채동시봉안우조사전(光武十年丙午八日…義湘祖師改粉入彩同時奉安于祖師殿)’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상대사의 영정을 개분할 때 같이 개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사전(祖師殿)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와즙이다. 현재 풍우로 퇴락하여 매우 허술하나 건물 양측 기둥 위로 서까래받이를 길게 늘이고 붕을 마련하였다. 옥내에는 9위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의상조사지진영(義湘祖師之眞影)」은 폭 85.5㎝, 길이 1.33m로 묵기는 없으나 1906년(광무 10)에 개분하였다.

칠성각(七星閣)은 1950년에 지방 신도로 구성된 칠성계에서 창건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규모가 작은 목조 와즙이다. 안에는 칠성탱화 1점이 봉안되었는데 폭 1.87m, 길이 1.46m이고 하부에 묵서가 있어서 다른 여러 탱화의 개분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1899년(광무 3)에 설치한 범종루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풍우로 훼손되어 중수하였고 종각은 범종각(梵鐘閣)에 괘종 병용(掛鐘 並用)하던 것을 다시 종각을 신축하여 대종(大鐘)을 달아 1978년 9월 19일에 타종식을 하였다.

소장 유물로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문촬요(禪門撮要)』, 『대방광단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丹覺修多羅了義經)』,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금강반야경소론찬요간정기회편(金剛般若經疏論纂要刊定記會編)』,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사분계본여석(四分戒本如釋)』, 『칠중수계의궤(七衆受戒儀軌)』, 『치문경훈(緇門警訓)』, 『칠구와불모소설준제시라니경(七俱瓦佛母所說准提施羅尼經)』,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設大報父母恩重經)』, 『불설무량수경(佛設無量壽經)』,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設天地八陽神呪經)』, 『불영사 불량답소전책(佛影寺 佛糧沓疏傳冊)』, 「불영사 설선당준각기문(佛影寺 說禪堂浚閣記文)」, 「불영사 시창기(佛影寺始創記)」,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 등의 문헌이 있다.

그밖에 불영사 만고화(萬古和), 「산신탱(山神幀)」, 「신중탱(神衆幀)」, 「시왕탱(十王幀)」, 「석가여래탱(釋迦如來幀)」, 불영사 법고(法鼓), 불영사 금구(金口), 불영사 대웅보전 현판(懸板), 「관음보살후불탱」, 「적묵당창설선원기(佛影寺 寂默堂創設禪院記)」, 「대방광불화엄경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抄)」, 「대방광불화엄경현행원품소(大方廣佛華嚴經賢行願品疏)」, 「불영사 유제(佛影寺 留題)」, 불영사 인합(印盒), 불영사 가직인(佳職印) 및 가직장(佳職章), 「석가모니후불탱」, 「독성탱화(獨聖幀畵)」, 「삼장탱화(三藏幀畵)」, 불영사 불연(佛輦), 불영사 황화실(黃華室) 현판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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